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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때 특별소해부대의 파견을 지시했던 요시다 시게루 당시 총리(앞줄 오른쪽에서 셋째)가 소해부대원들과 함께 찍은 사진. 태평양전쟁 종전 후 진주한 미군은 일제의 전력을 모두 해체했으나, 일본 연안의 기뢰 제거작업을 위해 소해부대는 존속토록 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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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산상륙’ 소해부대 파견…전사자도 나와
옛 일본군 출신들, 미군 도와 병참업무도
일 정부, 북한과 수교 대비 사실공개 꺼려
1998년 ‘해상보안청 50년사’에서 첫 언급
‘한국전쟁과 일본’ 연구해온 오누마 교수
한국전쟁이 일본에 끼친 영향은 경제적 재활의 발판 마련, 재무장, 공안기구 재정비, 반동정치세력의 부활 등 내정의 차원에 그치지 않았다. 일본은 한반도에 소해정 부대를 보내 군사작전에 참여했고, 태평양전쟁 당시 미군의 공습에서 벗어나 파괴를 면했던 군수시설을 전면 가동해 유엔군에 탄약을 공급하는 등 군사적으로 관여했다. 하지만 일본 정부의 비밀주의 탓인지 이런 군사적 측면에 대한 연구는 그다지 활발하지 못한 편이다. 이 부문의 전문가로 꼽히는 오누마 히사오(60) 교아이학원 마에바시국제대학 교수를 지난 5월20일 학교로 찾아가 얘기를 들었다. 그의 저서로는 <조선분단의 역사 1945~1950> <조선전쟁과 일본> 등이 있다.
-일본이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고 말할 수 있나?
“한국전쟁이 터지자 점령군 총사령관인 맥아더 장군은 1950년 7월8일 요시다 시게루 총리에게 경찰예비대를 만들도록 지시해 재군비의 길을 열었다. 경찰예비대는 일본이 독립하고 나서 자위대로 탈바꿈했다. 전쟁 발발 당시 일본에 군대는 없었지만, 한반도의 지리 지형을 잘 아는 옛 일본군 출신들이 있었다. 이들은 점령군사령부의 정보조직(G2)에 협력해서 유엔군의 상륙작전 등을 돕는 정보 제공을 했다. 일부는 상륙용 함정(LST)에 선원으로 승선해 일종의 병참업무를 담당했다. 전투에 직접 참가하지는 않았지만 후방에서 전쟁 수행을 지원했다. 그래서 일본이 넓은 의미에서 참전국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요시다 총리도 가능한 한 협력하라고 했다. 유엔군에 혈액을 보내자는 헌혈운동이 벌어졌고 인천·부산 등지에서 연합군 함정을 수리하거나 항만 준설작업을 했던 일본인도 상당수 있었다.”
-일본이 한국전쟁에 참여한 진상이랄까 전체상이 아직도 명확히 정리되지 않은 배경은 무엇인가?
“일본의 외교문서 공개는 한참 뒤처져 있다. 한-일 국교정상화 교섭도 한국 정부는 관련 문서 공개를 했지만, 일본은 하지 않았다. 외무성은 북한과의 수교 교섭에 대비해 자신의 손바닥을 보여주려고 하지 않는다.”
히로히토, 맥아더 만나
한국전쟁 발발 예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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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누마 히사오(60) 교아이학원 마에바시국제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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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미카제 출신까지 지원 -북한군의 침공이 있자 중의원 의원 세코 고이치, 우익계의 거물 고다마 요시오는 일본인 의용병을 한국에 보내야 한다고 주장하고 맥아더 장군에게 허락을 요구하는 편지를 보냈다. 이것은 개인의 돌출된 행동이냐 아니면 우익보수 진영의 일반적 정서를 대변하는 것이냐? “우익 민족파라고 하지만 일제의 군인들과 맥을 잇는 사람들이다. 일본 사회에서 한정된 의견으로 봐야 할 것이다.” -다나카 고타로 최고재판소장관(대법원장)은 당시 일본인이 자위를 위해 한국전에 참여하는 것은 법률상으로 가능하다는 발언을 했다. 법률 해석의 최고 권위를 갖는 자리에 있는 사람의 발언이라 당연히 무게가 실리는데 요시다 내각과 사전조율된 것이냐? “다나카가 요시다 총리와 직접 대화를 하고 발언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일본이 독립하면 재군비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사람이다. 한국전쟁을 재군비를 하는 데 하나의 기회라고 봤다. 한국에 의용병을 보내도 법률상 문제가 없다고 한 발언은 재군비론의 연장선상에서 나온 것이다. 그렇지만 맥아더가 거부했고 이승만 대통령도 거절해 일본인 의용병 파견은 실현되지 않았다.” -일본 좌파 진영은 어떻게 대응했나? “사회당이나 사회당계 노동운동 단체 총평은 한국과 유엔군을 지지했다. 아사누마 이네지오 사회당 서기장은 유엔군을 위해 헌혈까지 했다. 하지만 공산당은 남한이 북한을 침략했다고 주장했다. 공산당이 남침을 인정한 것은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다.” -민단의 의용병 모집에 일본인도 지원했다. 심지어 가미카제 특공대 출신도 끼여 있었다던데 패전 후 일본에 일자리가 없어서 그랬던 건가? “그런 점도 있을 것이다. 엘에스티에 탄 선원들도 마찬가지다. 위험은 있었지만 봉급 등의 조건은 좋았다. 민단은 일본인들이 지원한 심정은 이해하지만 거절했다. 당시는 전후의 혼란이 계속되던 때라 중국 등지의 대륙에 남아 있던 일본인들의 출입이 활발했던 시기다. 그런 상황에서 일본인이 조선인·한국인으로 위장해 한국으로 간 사람이 있었을지 모르나, 정식으로 일본인이 의용병으로 참가했다는 기록은 없다.” -미군부대에 일본계 미국인이 많아 일본인의 한국전 참가설이 번지기도 했는데? “일계 미국인 장병은 하와이·캘리포니아 출신이 아주 많았다. 일본어를 잘했으니 북한군이 그들을 보고 일본인으로 생각했을 만하다. 북한군에 포로로 잡혔던 미군 수기를 보면 북한은 당시 일본군이 대거 참전했다고 대단히 걱정을 했다고 한다. 중국 의용군에는 아주 소수이지만 팔로군에 들어갔던 일본인도 있었다. 그러니 일본인들도 한국전쟁 때 남북의 편에 서서 싸운 셈이다.” 마에바시/글·사진 김효순 대기자 hyoskim@hani.co.kr
“미군, 4백만엔 주며 ‘동생 사망’ 함구요청
해상보안청 찾아가니 ‘모든 기록’ 사라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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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타니 도이치가 지난 5월23일 오사카의 자택에서 야스쿠니신사의 답신문서를 들고서 자신의 동생이 한국전쟁에 참전해 숨진 경위를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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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산 앞바다가 틀림없어 소해정 침몰 사고가 난 지 1주일쯤 지나 점령군사령부의 미군 장교가 해상보안청 직원과 통역을 대동하고 나카타니의 고향집으로 찾아왔다. 나카타니 도이치는 당시 오사카에 있어 미군 장교 일행을 직접 만나지는 못했다. 미군 장교는 한국전쟁에서 전투작업중 배가 기뢰에 부딪쳐 침몰하는 바람에 한 사람이 행방불명됐는데 사카타로인 것 같다고 통보했다. 그는 아직 수색작업이 진행되고 있으나 만일 일본인이 한국전쟁에 종사하다 순직했다는 것이 알려지면 아주 곤란한 일이 되니 일체 공개하지 말아줄 것을 요구했다. 그는 또 한국이 아니라 일본의 내해인 세토나이카이에서 기뢰제거 작업을 하던 중 사망한 것으로 해줄 수 없겠느냐고 물었다. 미군 장교는 충분한 보상을 하고 부친에게 연금도 주겠다고 했다. 도이치는 미군 쪽에서 400만엔을 갖고 왔다고 했다. 현재 시세로 하면 약 2억엔이 되는 거금이다. 당시는 가장 고액권이 100엔짜리였으니 돈다발도 엄청났다. 도이치는 돈의 출처가 일본 정부가 아니라 미군이라고 말하고 성격에 대해서는 일종의 입막음용이라고 잘라 말했다. 하지만 연금 얘기는 흐지부지됐다. 일제 때 천황(일왕)의 근위병으로 근무했던 일을 자랑스러워했던 나카타니의 부친은 전승국인 미국의 부탁을 거부하면 가족 전원이 말살될지도 모른다고 걱정을 했다고 했다. 그래서 가족 형제 일가친척에게 아들의 사망 경위를 절대로 입 밖에 내지 말라고 엄명을 내렸다. 얼마 후 유골상자가 집으로 왔는데 사진만 들어 있었다. 해가 바뀌어 1951년 히로시마 구레항에서 해상보안본부장으로 장례식을 치른다는 통보가 왔다. 도이치는 부친한테서 장례식에 가보라는 말을 들었다. 당시 오사카에서 소방관으로 취직한 그는 가지 못했다. 공무원이니 휴가를 내려면 숙박지·목적 등을 밝혀야 하는데 동생의 사망 경위를 얘기할 수 없어 포기했다. 결국 부친이 참석했다. 도이치는 소방관으로 일하면서 동생의 죽음에 대한 진상을 알고 싶어 자료를 모으려 했지만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1978년 사카타로에게 훈8등의 훈장이 수여됐다. 도이치는 마침내 동생의 순국을 국가가 인정해주었다는 생각이 들어 야스쿠니신사에서 연락이 올 것을 기대했으나 아무런 통지가 없었다. 그래서 신사를 방문해 단편적 자료들을 보여주며 합사해달라고 요청했더니 무슨 사고로 순직했는지 관청의 증명서를 가져오라고 했다. 놀랍게도 해상보안청에는 당시 기록을 모두 소각처분했는지 아무것도 없었다. 도이치는 소해부대 파견이 전쟁 포기를 명시한 헌법 9조에 저촉되기 때문에 정부가 관련 기록을 모두 없앤 것으로 본다. 도이치가 유일하게 찾아낸 관공서의 기록은 제적부다. 일본에서 사람이 죽으면 호적에서 지워지는 대신 제적부에 올려 100년 동안 보존하도록 돼 있다. 혹시나 해서 고향의 관청에 동생의 제적등본 조회를 하니 “쇼와 25년(1950년) 10월17일 오후 3시30분 북위 39도12분34초 동경 127도35분37초에서 사망. 제7관구 해상보안부장 보고 쇼와 26년(1951년) 6월5일”이라고 적혀 있었다. 위도와 경도로 보아 동생이 숨진 장소는 원산 해역임이 틀림없었다. 도이치는 2006년 이 제적등본 등을 근거로 야스쿠니신사에 동생의 합사를 요구했다. ‘대동아전쟁’(태평양전쟁)의 전몰자까지 합사를 하고 있어 한국전쟁은 대상 밖이라는 답변이 왔다. 그는 포기하지 않고 2009년 다시 요구서를 보냈지만 비슷한 취지의 답신이 왔다. 도이치는 야스쿠니신사가 사안의 민감성을 고려해 답변을 하기 전에 관련 정부기관과 충분한 협의를 거쳐 문안 하나하나를 세밀하게 다듬은 것 같다고 말했다. 오사카/글·사진 김효순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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