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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일 일본 오사카 히가시오사카시에 자리한 오사카조선고급학교 운동장에서 1·2학년으로 구성된 오사카조고 B팀(2군·오른쪽 하얀 운동복)이 교토의 라쿠호쿠고교와 연습경기를 하고 있다. 오영길 럭비팀 감독은 “오사카조고 팀의 활약이 뛰어나다 보니 연습경기를 원하는 일본 학교들이 많다”고 말했다. 전국대회에 참가하는 A팀(1군)은 부상에 대비해 이날은 자체 연습에만 몰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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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 다큐영화 ‘60만번의 트라이’ 그 후
“자, 모이자!” 지난 21일 오후 4시 오사카부 히가시오사카시 오사카조선고급학교(이하 오사카조고). 너른 흙바닥 운동장 위에서 60만 재일동포들의 자랑인 오사카조고 럭비부 학생들이 한데 뭉쳤다. 주장인 이승기(18)의 외침에 모여든 학생들은 둥그렇게 어깨동무를 하고 힘찬 구호를 외친 뒤 27일 시작된 94회 일본 전국고등학교럭비대회에 대비한 연습을 시작했다. 학교 본관 건물의 정면엔 ‘우리말을 잘 배우고 늘 쓰자’는 글귀가 붙어 있고, 그 앞에선 학생들을 응원하러 온 학부모들이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오사카조고 럭비부의 활약은 지난 8월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60만번의 트라이>(감독 박사유·박돈사)를 통해 한국 사회에도 적지 않은 울림을 남긴 바 있다. 영화는 승기의 4년 선배인 ‘주장’ 김관태(22·간사이학원대학 4년)와 ‘에이스’ 권유인(데이쿄대학 4년) 등이 재일조선인 사회를 둘러싼 차별에 굴하지 않고 럭비의 ‘노 사이드 정신’(경기가 끝나면 적과 동지가 모두 친구가 된다는 정신)을 지키며 정정당당한 승부를 겨루는 과정을 소개했다. 이 영화는 다큐멘터리 영화로는 드물게 한국에서 2만5000명의 관객을 불러 모았다. 럭비는 한국에선 비인기 종목이지만 세계적으로 럭비 월드컵은 축구 월드컵, 올림픽 등과 함께 3대 스포츠 행사로 꼽힌다. 학원 스포츠의 저변이 넓은 일본에서도 인기 종목이다. 오사카조고 럭비부의 오영길 감독은 “오사카부 안에만 110개의 고등학교 팀이 있고 15인제 대회에 나가는 팀은 70개에 이른다”고 말했다. 오사카조고는 일본에서도 강팀이 몰려 있는 오사카부의 예선을 뚫고 전국대회에 2009년부터 6회 연속 진출(통산 9번 진출)하는 빼어난 실력을 자랑하고 있다. 3년 전 선배들이 이룬 업적은 일본 전국대회 4강, 지난해엔 그보단 조금 못 미친 8강까지 진출했다. 대회가 가까워질수록 올해 성적에 대한 재일동포 사회의 기대감도 높아졌다. 조선학교 오사카조고 럭비부올해까지 6회연속 전국대회 진출
재일동포들 기대감도 높아졌다 차별 맞서 1990년대초 따낸 참가권
대학 진학 등 희망이 싹텄지만
아베정권 들어 위기에 직면했다 고교 무상화 제외·보조금 삭감…
동포학생들의 힘겨운 투쟁을
한국사회는 불구경해도 되는걸까? 일본 고등학교의 럭비 전국대회는 15인제 방식으로 진행된다. 15인제에선 든든한 체격을 자랑하는 8명이 상대에 맞서 스크럼을 짜고, 나머지 7명은 스크럼에서 흘러나온 공을 받아 돌진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얼핏 보면 선수들이 무질서하게 엉켜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15명의 선수는 정해진 번호에 따라 각자 맡은 역할을 수행해 가며 ‘한 사람은 전체를 위해, 전체는 한 사람을 위해’(One for all, all for one)라는 럭비의 정신을 구현한다. 주장인 승기는 “올해 목표는 당연히 우승”이라고 말했다. 팀에서 승기의 역할은 4번인 ‘록’(lock)이다. 록은 스크럼에서 상대팀과 직접 맞붙게 되는 프롭(prop)을 지지하는 역할이다. 맨몸으로 상대와 몸싸움을 벌이다 보니 얼굴엔 크고 작은 상처가 그칠 날이 없다. 승기에게 록의 역할을 물으니 “프롭을 받치며 전체 팀을 위해 희생하는 역할”이라고 짧게 답했다. 승기에게 럭비는 꿈이자 희망이고, 자신이 지금까지 해온 모든 것이기도 하다. 승기의 고향은 오사카에서 전철로 한시간 반 정도 떨어진 효고현 고베시다. 럭비가 좋아서 초등학교 3학년 때 운동을 시작했고, 그래서 집에서 가까운 고베조고 대신 럭비 명문인 오사카조고 입학을 결심했다. 승기는 매일 아침 4시 반~5시에 일어나 자전거를 타고 역으로 가 한신선과 긴테쓰선을 이어 타고 학교에서 가장 가까운 가와치하나조노역에 내리는 고행을 계속하고 있다. 그렇게 학교에 도착하면 아침 7시. ‘힘들지 않으냐’는 질문에 승기는 멋쩍게 웃고는 별다른 말이 없었다. 승기의 앞에서 상대 스크럼과 직접 대치하는 1번 프롭 역할을 맡고 있는 것은 2학년생 안창호(17)다. 창호도 승기처럼 고베의 조선초중급학교를 거쳐 오사카조고로 진학했다. 창호의 누나 사호(19)는 올해 한국체대에 진학한 유도 유망주다. 사호는 국제대회에 한국 대표로 나간 적도 있다. 창호는 “선배들과 같이 뛰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이다. 조금 긴장하고 있지만 크게 활약하고 싶은 욕심도 있다”며 웃었다. 올해 아이들의 전력은 어느 정도일까. 오사카부 예선은 참가 학교를 추첨으로 3개 지구로 나눈 뒤, 각 지구의 우승팀이 전국대회에 진출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시드 배정을 받아 1차전을 부전승으로 통과한 오사카조고는 11월2일 예선 2차전에서 도네야마고교에 137-0으로 일방적인 승리를 거둔 뒤, 11월9일 3차전 나니와고교에도 54-7의 쾌승을 거뒀다. 11월16일 치러진 지구 결승전에선 오사카산업대학부속고교를 36-14로 꺾고 지구 우승을 거두며 전국대회 진출을 결정지었다. 오영길 감독은 “3년 전 선배들과 견줘도 손색없는 전력”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조선학교 학생들이 처음부터 일본 학생대회에 나가 꿈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대회 참가권을 따내는 것 자체가 1990년대 초반 재일동포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투쟁의 결과다. 운동장 한켠에서 아이들의 훈련 장면을 지켜보던 신정섭(54)씨는 “우리에겐 꿈과 희망이 없었다”고 말했다. 신씨는 오사카조고 팀에서 7번 플랭커(flanker)로 활약하는 신현지의 아버지다. 럭비 하면 신씨에게도 하고 싶은 말이 많다. 그도 고베조고 시절 럭비를 했던 선수 출신이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 땐 전국대회에 나가지 못해 일본 고등학교 팀과 연습 경기만 뛰어야 했다. 현재는 아이들이 꿈을 좇을 수 있다는 점이 많이 다르다”고 말했다. 아이들이 전국대회에서 뛰어난 성적을 낸 덕분에 현지는 일본 대학 럭비부 최강팀인 데이쿄대학, 승기는 호세이대학에 입학이 확정됐다. 신씨는 럭비팀 오 감독의 4년 선배, 주장인 승기 아버지의 2년 선배이기도 하다. 럭비팀을 지키고 유지해가는 것은 재일동포 사회의 존엄을 지켜가는 것과 같은 일로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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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조고 곳곳에는 27일 개막한 94회 일본 전국고등학교럭비대회 진출 소식을 알리는 포스터나 펼침막이 붙어 있었다. 이번 대회에서 오사카조고가 어떤 성적을 거둘지는 학교뿐 아니라 60만 재일동포 사회 전체의 관심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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