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7.11 18:17
수정 : 2019.07.11 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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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8일 일본 도쿄 신주쿠 카페에서 이광평씨가 <만주로 건너간 조선인들> 일본판 사진집을 소개하고 있다. 도쿄/조기원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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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 2세’ 이광평 전 룽징현 문화관장
‘만주로 건너간 조선인들’ 일어판 사진집
1999년부터 10여년 5만㎞ 600명 증언 채록
“일제때 만주에 일본인보다 조선인 많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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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8일 일본 도쿄 신주쿠 카페에서 이광평씨가 <만주로 건너간 조선인들> 일본판 사진집을 소개하고 있다. 도쿄/조기원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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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옛 만주(중국 동북지방인 랴오닝성, 지린성, 헤이룽장성 등을 일컫는 명칭)로 건너간 조선인들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조선족 2세로 룽징(용정)현 문화관장을 지낸 이광평(74)씨는 이 물음의 답을 찾기 위해, 10년 이상 사진을 찍고 600명의 증언을 채록했다. 5만㎞ 넘는 거리를 오토바이와 자동차로 이동해가며 모은 사진을 토대로 최근 일본에서 <만주로 건너간 조선인들>이라는 사진집을 냈다. 그의 채록 증언에는 “만주에 가면 모두 부자가 된다”는 거짓말에 속아 만주로 온 평범한 조선인들의 사연이 나온다.
지난 8일 도쿄 신주쿠구에서 저자를 만났다. 그가 만주의 조선인을 테마로 사진을 찍기 시작한 계기는 “집단 이민”이라는 생소한 단어 때문이었다. 1999년 지린(길림)성 옌볜조선족자치주 왕칭현 한 마을에 갔다가, 마을이 조선총독부 계획에 따라 조선에서 집단 이주해온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옛 기록을 찾아봤지만 “집단 이민”이라는 단어 자체가 없거나 있어도 개략적인 내용이 몇쪽에 불과했다. 이때 조선족 생활사 공백을 메우겠다고 결심했단다.
일제는 1931년 만주사변 이후 괴뢰국인 만주국을 세우고, 동북항일연군(중국인과 조선인이 연합한 항일 무장단체) 주요 활동 지역에 집중적으로 조선인 집단 이주민을 정착시켰다. 집단 이주한 조선인들은 항일연군에게 식량을 내주면 뒤에 들이닥친 일본군에게 취조를 당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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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왕칭현으로 이주해온 서타관씨를 2003년에 촬영한 사진. 서 할아버지는 젊은 시절 토담을 쌓다가 허리를 다쳐서 노년에는 허리를 펴지 못했다고 한다. 이광평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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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에 네 차례나 찾아가 겨우 사진을 찍은 위안부 피해 할머니의 모습. 평안(平安)이라고 쓰인 반지를 끼고 있다. 할머니는 취업 자리가 있다는 말을 듣고 부산에서 만주로 갔다가 위안소로 끌려갔다. 이광평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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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조선족 내부와 중국에서 조선인 집단이주의 역사는 제대로 연구되지 않았다고 했다. “조선족도 역사를 연구하는 분들은 주로 항일 투쟁사를 연구했죠. 일부 중국 학자들은 일제가 만주국을 세운 뒤 건너온 조선인들을 좋게 보지 않았어요.”
그의 사진은 일상적 기념사진처럼 보이지만 아픈 이주 역사를 말하기에는 부족하지 않다. 2003년 왕칭현에서 촬영한 서타관 할아버지는 사진 속에서 텃밭에 거의 엎드려 있다. 1937년 왕칭현으로 이주한 그는 이주 초기 토담을 쌓는 공사에 동원됐다가 허리를 다쳤다. 노년 들어 그 후유증으로 거의 기어서 생활한단다. 2007년에 네 차례나 찾아가 겨우 사진을 찍었던 위안부 피해 할머니는 ‘평안’(平安)이라고 쓰인 반지를 끼고 있다.
사진집 출판에 참여한 재일동포 김부자 도쿄외국어대 대학원 교수는 “일본에서 만주 이민자는 일본인만 있었다고 생각하는 이가 많다. (패전 뒤) 일본인들이 도망올 때 고생했다는 식으로 말을 많이 한다. 그러나 그 시절 만주에는 일본인보다 조선인이 많았다. 200만명 이상이었다. 식민주의 역사이기에 한국에도 이 책이 소개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도쿄/조기원 특파원
garde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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