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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진] 한해가 간다...미안하다 친구야! |
한 해를 정리하기 위해서 짬을 내 올 한해의 기록이 담긴 다이어리를 살펴보았다. 작년 연말에 산 벤저민 프랭클린의 <덕의 기술>을 출판한 “21세기북스”에서 책과 함께 선물로 준 다이어리였다. 매일 매일 일기식으로 기록할 수 있게 편집된 매우 만족스런 다이어리였다. 일기를 많이 적어 넣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올 한해를 돌아볼 수 있는 여러 사건들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었다.
다이어리를 읽다가 난 한동안 잊고 지냈던 일본에서 만난 한 친구에 대한 기억을 떠 올렸다. 그는 일본에서 처음 만나 반갑고 기쁜 마음으로 소중한 우정을 지켜가자고 약속했었던 친구였다. 그런데 그는 일본에서 돌아와 한 번인가 이메일을 주고받은 이후 지금까지 무심히 잊고 지나쳐버린 내 주변의 한 존재가 되어버렸다. 그렇게 쉽게 잊어서는 안 될 소중한 친구였는데...친구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서둘러 메일을 보내기로 했다.
기록에 보니 내가 그 친구를 만난 건 2005년 1월 24일 저녁이었다. 일본은 처음 여행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공항에 도착하기 전부터 많은 생각이 교차했다. 무엇보다도 민족간의 감정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잘 정리가 되지 않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일본과의 개인적인 첫 만남이 약간 긴장되기도 했다. 일본에서 불어오는 한류 열풍의 실체도 조금은 체험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도 있었다. 이런 저런 복잡한 감정으로 후쿠오카 공항에 내리면서 시작된 일본 체험에서 가장 소중했던 경험은 친구 세토(seto)를 만난 것이었다.
도착 첫날, 오후 나와 함께한 일행은 숙소가 있던 일본 큐슈 지방의 한 작은 도시 사가현의 시내를 방문했다. 특별히 그곳에는 일본에서 최초로 완전한 규모의 메인 캐슬(main castle)을 복원해 놓은 “사가성”이 있었다. 사가현 역사박물관 맞은 편에 위치한 사가성은 17세기 에도시대 때 세워져 10명의 막부들에 의해 유지되던 일본의 전통 캐슬 중의 하나였다. 사가현은 약 300억원을 들여 전통방식과 현대성이 어우러진 최신의 성으로 복원하여 관광객들을 맞고 있었다. 입구의 성곽에서부터 성 내부에 이르기까지 규모 면에서는 최고 수준의 유적지였다.
어둠이 막 내리기 시작한 시간, 우리 일행이 사가성에 들렸을 때 그곳 직원들은 우리를 매우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지방 유적지라서 상대적으로 외국인 관광객들이 적게 찾는 곳이어서 그런지 우리를 대하는 직원들의 태도는 정말로 친절했다. 특별히 한 직원이 직접 우리를 안내해 주겠다고 나서 꽤 준비된 영어로 성의 곳곳은 물론 이 성에 얽힌 역사까지 자세하게 안내해 주었다. 그 때 안내를 해주던 직원이 바로 세토였다.
일본의 역사와 사가성의 역사에 대해서 그와 대화를 나누면서 난 그동안 알지 못했던 일본을 좀더 이해할 수 있었고, 실감나게 정보들을 얻을 수 있었다. 특별히 사가성 복원과 관련해 일본인들이 신경을 쓴 전통과 현대 기술의 조화는 오늘날 역사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 지에 대한 깊은 생각을 갖게 해 주었다. 사실 그 당시 내가 느낀 것은 일본 사람들은 역사에 대한 과장이 좀 심하다는 것이었다. 나중에 방문했던 유토쿠이나리 신사나 요시노가리 선사 유적지, 나가사키의 평화 박물관과 공원 등 대부분의 유적들이 역사성에 대한 진실한 접근과는 다소 거리가 있어 보일만큼 과장된 면이 많이 있었다.
하지만 그 역사를 설명하고 안내하는 세토의 친절은 진실 그 자체였다. 내가 일본에 대해서 호감을 갖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그 나라의 역사라든가 경제 등이 아니라 그 나라를 구성하고 있는 구성원들의 순수한 마음 때문이었다. 물론 일본의 극우주의, 천황숭배 등의 정신이 그들의 가치관을 어떻게 만들어 내는 지에 대한 구체적인 이해는 아직 경험하지 못했지만 적어도 그 때 내가 만난 일본 사람들은 대부분 진지했다.
세토는 참 성실하고 점잖은 친구였다. 대화도 잘 이루어졌을 뿐만 아니라 마음을 열고 함께 친구를 삼을 수 있을 만큼 꽤 열려있는 친구였다. 예법도 잘 알고, 함께 정을 나눌 수 있는 그의 에토스와 파토스가 나의 그것과 잘 조화되었다. 특별히 자신의 전공과 직업에 강한 자부심을 가질 만큼 실력도 갖춘 친구였다.
첫날의 만남이 있고 난 며칠 후, 세토와 몇몇 사가성 직원들이 우리의 숙소로 방문을 했다. 그날 밤 우리 일행과 그들은 함께 밤을 새면서 우정을 나누었다. 그만큼 가깝게 소중한 우정을 나눌 수 있었다. 난 세토에게 자주 연락하자는 다짐을 했고, 계속 우정을 이어가자고 약속을 했다. 그렇게 소중하게 쌓은 우정이었는데 그만 한국으로 돌아온 후 현실에 떠밀려 그 소중한 우정을 잊고 말았던 것이다.
“미안하다 친구야! 2005년이 시작되면서 우리의 첫 만남이 이루어져 한 해가 더 행복하고 희망이 있을 것 같았는데 이렇게 그 희망이 의미를 접고 한 해를 무심히도 보내버렸구나. 그러나 현실의 어둠이 우리의 존재를 서로 가리었을 뿐 마음속의 빛까지도 꺼져버린 것은 아니다. 그러니 야속해하지 말고 이제라도 마음의 끈을 연결해서 다시 그 우정을 세우자.”
세토가 있어서 한 해가 더 소중했었는데, 그 소중한 시간들을 허비해 버렸다고 생각하니 씁쓸한 마음을 지울 수 없다. 그러나 끝나지 않은 우정이기에, 다시 세울 수 있는 우정이기에 정말 다행이다. 연초에 만남을 가져, 연말에 다시 그 우정의 끈을 연결하고, 다가오는 새해엔 그 소망의 불을 피우면 되겠지. ‘아! 그래서 연말과 연초가 소중한 것이구나.’
나뿐만 아니라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지구촌 가족들이 소중한 연말과 연초를 맞이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그리고 혹시 나처럼 한 해 동안 잊었던 소중한 우정이 생각나는 사람들이 있다면 이 해가 다가기전에 그 우정의 끈을 다시 이어 희망의 새해를 맞이하기를 바란다.
이해인님의 시 <새해엔> 중에서 “누구에게나 친구로 다가가는 이웃...사랑의 사람이 되게 하소서”라는 구절이 더욱 소중한 이 연말이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필자, 기자가 참여한 <필진네트워크>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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