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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9.25 18:33 수정 : 2006.09.25 18:33

왜냐면

학생 인권은 학교 담벼락 앞에서 멈춘다고 한다. 그렇기만 한 것일까. 아니다. 가정과 사회 곳곳에서 이미 망가져 있다. 우리 아이들을 교육의 중심축에 놓고, 그동안 체벌과 무관심이라는 양극단 속에 방기해 온 아이들의 자아 존중감을 되돌려 주어야 한다.

우리는 흔히 “선생님의 지도편달을 바랍니다”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편달(鞭撻)은 채찍으로 때린다는 뜻이다. 선생님의 교직생활을 교편(敎鞭) 잡는다고도 한다. 이는 체벌이 교육상 비중이 막대함을 이름이요, 우리나라가 체벌에 매우 관대한 사회임을 말해준다 하겠다.

나는 체벌 논란이 있을 때마다 학생의 훈육과 다른 학생의 학습권 보호를 위해 ‘사랑의 매’에 찬성하는 쪽이었다. 교육적인 체벌은 필요악이라고 항변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사랑의 매’에 사랑이 없다고 판단하게 된 것은 잘잘못을 떠나 40여년 세월의 가르침을 외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1963년 경북 상주 산골학교에서의 5학년 담임 시절, 내 젊은 혈기를 뛰어넘는 굉장한 개구쟁이가 있었는데 매를 많이도 댔고, 종류도 다양했다. 하루는 그 아이의 아버지랑 술 한잔 하고 있었는데 아이가 여태 집에 오지 않았다고 어머니가 걱정하시는 게 아닌가. 아차 싶었다. 아이의 아버지와 함께 학교 운동장 모퉁이에 있는 함석 창고에 갔더니 그 아이는 깍지 낀 두 손을 들고 벽에 기우뚱 기댄 채 자고 있었다. 오후 수업을 4시께 마쳤으니 두 시간은 넘게 벌을 선 셈이었다. 지금도 그때 생각을 하면 수치심으로 한없이 괴롭다. 체벌은 학생만이 아니라 교사 자신도 체벌받는 일이 된다는 걸 40년이 넘어서야 알게 된 셈이다.

가끔 ‘사랑의 매 증정식’이라는 언론보도를 보게 되는데, 이런 나라가 우리나라 말고 또 있을까. 이는 교사의 권위를 살려 주기 위해서가 아니다. 이유는 딱 하나, 내 아이의 성적 때문이다. 한 통계를 보면 교사, 학부모, 심지어는 학생들 다수가 체벌의 교육적 효과에 대해 긍정적(60~80%)이라는 통계가 있다. 그러나 통계는 통계일 뿐 진리일 순 없고, 체벌의 당위성을 담보할 수도 없다.

요즈음 체벌에 대한 법제화가 논란이 되고 있다. 교육부는 체벌 금지가 교권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판단에서 현행 초·중등교육법 시행령에 규정돼 있는 교내봉사, 사회봉사, 특별교육 이수, 퇴학 등 네 가지 징계 규정에 출석정지 조항을 추가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한다. 앞으로 이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진행되겠지만, 명심해야 할 일은 체벌이 온존된 채 방치된다면 우리의 미래가 그만큼 상처받는다는 사실이다. 또한 교사의 체벌은 학생의 인권을 빼앗는 일이요, 교사의 권위를 추락시키는 부메랑이 된다.

따라서 정부는 헛바퀴 도는 전시적인 정책만 쏟아낼 게 아니라, 기존의 잘못된 틀을 손질하면서 탈을 걷어내기 위한 장기적 전망을 세워야 한다. 그리고 자녀 과잉보호, 여론몰이 등으로 학교 기죽이기에 앞장서온 학부모와 언론매체에서는 그동안의 잘못된 매너리즘을 깨는 아픔을 감내하고 근본적인 대책을 고민해야 한다. 그러지 않고서는 학생체벌 문제, 공교육 위기 문제는 백년하청일 수밖에 없다. 오죽하면 유엔 아동인권위원회가 학생체벌을 금지하라고 계속하여 권고하겠는가.


학생 인권은 학교 담벼락 앞에서 멈춘다고 한다. 그렇기만 한 것일까. 아니다. 가정과 사회 곳곳에서 이미 망가져 있다. 우리 아이들을 교육의 중심축에 놓고, 그동안 체벌과 무관심이라는 양극단 속에 방기해 온 아이들의 자아 존중감을 되돌려 주어야 한다. 아이들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일은 우리 어른들이 떳떳이 존경받는 일이요, 이에 대한 해결방법을 찾는 것은 강자인 어른들의 몫이다. 정작 회초리가 필요한 사람은 서로 존중하는 법을 외면하고 존경받기만을 바라는 무식한 어른들이지 우리 아이들이 아니다. 어쨌거나 체벌은 교육이 아니다.

신창선 /부산 장산초등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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