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6.11.13 17:35
수정 : 2006.11.13 17:35
왜냐면
자식에게 부르기 좋고 서기(瑞氣)도 담긴 이름을 지어주고 싶은 것은 이 세상 모든 부모의 바람일 것이다. 작명에 관해서는 <예기> ‘곡례’ 편을 참고할 만하다. “자식의 이름을 지을 때는 나라 이름을 피하며, 해와 달로 짓지 않으며, 보이지 않는 곳에 나는 병명(病名)의 글자를 섞어 짓지 않으며, 산천의 이름으로 짓지 않는다.”
이렇게 부모가 고심하여 지어주신 이름은 각 개인에게 소중하고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다. 그래서 예전에는 이름 외에 자(字)를 지어서 이름 대신 불렀고, 성인이 되면 호(號)를 지어 불렀다. 지금까지도 우리는 남에게 자기 부모의 성명을 소개할 때 “○자 ○자를 쓰십니다”라고 하여 감히 부모 성명을 함부로 입에 올리지 않는다. 이렇게 부르기조차 두려워하고 소중히 여겼던 것이 한국인의 이름이다. “어찌어찌하면 내 성(姓)을 간다”는 말로 자기 확신을 표현하는 이도 있다. 그만큼 한국인의 정서에는 자기 성명에 대한 자부심이 내재해 있는 것이다. 일제 침탈기에도 뜻있는 이들은 목숨 걸고 창씨개명을 거부했고, 일제의 겁박에 못이겨 성과 이름을 바꾼 이들은 지금도 친일의 멍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렇게 지켜온 한국인의 성명(姓名)이 위기를 맞았다. 행정자치부는 2009년부터 새로 발급할 새 전자주민증에 한글과 로마자를 병기하고 한자 성명은 겉에는 보이지 않는 전자칩에 넣겠다고 한다. 판독기가 있어야만 읽을 수 있으니 아주 뺀 것이나 마찬가지다.
한국인의 족보 성명에는 개인마다의 자기 뿌리가 담긴다. 그 성씨와 항렬자의 한자를 보면 일가(一哥) 간 서계까지도 금세 알 수 있다. 한국의 족보를 최초로 연구하고 전산화했던 미국 하버드대의 고 와그너 박사는 “나는 증조부 이상의 얼굴과 이름을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고 말한 바 있는데 미국인들은 이제야 족보에 관심을 갖고 뿌리 찾기를 시작했다. 구한말 학자인 정만조 선생은 <만성대동보> 서문에서 “옛날 중국 족보는 4, 5대 기록에 그쳤지만 한국의 족보는 시조부터 상기(詳記)해 있다”고 하였다.
현행 한글표기법에서 ‘유’로 적게 되어 있는 성씨는 ‘柳’ ‘劉’ ‘兪’ ‘庾’ 등이 있고 ‘신’씨는 ‘申’ ‘辛’ ‘愼’씨가 있다. 그 밖에 ‘(정)鄭’씨와 ‘(정)丁’씨, ‘(조)趙’씨와 ‘(조)曺’씨, ‘(진)陳’씨와 ‘(진)晉’씨, ‘(강)姜’씨와 ‘(강)康’씨, (주)朱씨와 (주)周씨 등 같은 한글 음의 성씨는 많다.
새 주민증 성명에서 한자를 뺄 경우 같은 한글 음을 가진 성씨는 조상이 다른데도 모두 한 개의 성을 가진 일가가 될 판이요, 족친 간의 서계도 허물어질 수밖에 없다.
1999년에도 행정자치부는 주민등록증 성명을 한글만으로 표기하려다가 여론에 밀려 한글과 한자를 병기한 적이 있다. <예기> ‘곡례’편에는 “잘못을 알았으면 즉시 고쳐야 한다”고 하였다. 행정자치부는 이제라도 새 주민증 성명의 로마자 병기 안을 폐기하고 한글과 한자 병기로 바로잡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박광민/한국어문교육연구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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