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6.12.21 17:40
수정 : 2006.12.21 17:40
왜냐면
내가 근무하는 서울 잠신고등학교가 있는 잠실 2단지 지역은 학교만 섬처럼 남겨 놓은 채 삼년째 재건축 사업을 벌이고 있다. 300가구 이상 대규모 재건축 공사 현장에서 200m 이내에 자리잡은 학교가 전국에 400여곳, 서울에서만도 40여곳에 이르며, 앞으로 더 늘어날 전망이다. 이런 학교에서는 정상적인 학교 생활이 곤란할 정도의 심각한 학습환경 악화 및 건강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분진으로 말미암아 발병한 피부병이나 호흡기 질환으로 고통을 호소하는 학생이나 교사들이 급증하고 있다. 학교 주변을 둘러싼 위험시설 및 통학로 제한으로 통행에 불편을 겪거나, 안전 우려도 심각하다. 공사 중 소음으로 말미암은 수업 방해도 상상을 초월한다.
재건축(재개발) 사업 현장의 시공과 철거 과정에서 발생하는 분진에 발암물질이 포함돼 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또한 분진으로 말미암아 발병한 피부병이나 호흡기 질환으로 직접적인 고통을 호소하는 학생이나 교사들도 급증하고 있다. 학교에만 오면 기침이 심해진다고 호소하는 학생들도 적지 않고, 아예 천식이 심해져 전학을 간 학생도 있다.
그뿐만 아니라 학교 주변을 둘러싼 위험시설 및 통학로 제한으로 통행에 불편을 겪거나, 안전 우려도 심각하다. 지난 5월에는 원촌중학교 학생이, 지난 11월에는 잠신중학교 학생이 등굣길에 공사 차량과 부딪쳐 혼수상태에 빠졌다. 공사 현장에 대형 트럭이 수시로 드나드는 상황에서는 이런 사건이 언제든 재발할 수 있다.
공사 중 소음으로 말미암은 수업 방해도 상상을 초월한다. 학생들의 학교생활 시간대(평일 오전8시∼오후 4시, 토요일 오전 9시∼12시)에 공사를 제한하는 조처도 일부 학교 주변에만 적용된다. 우리 학교의 경우 수업을 방해하는 소음은 계속되고 있으나 시공사 쪽은 최선의 조처를 취하고 있다는 틀에 박힌 답변으로 일관한다. 이런 상황에서 피해는 고스란히 학생들과 교사들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다. 우리 학교 교사 및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재건축으로 학습에 부정적 영향을 받는다는 응답이 80% 이상이었다.
건강과 안전, 수업 환경처럼 직접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매우 중요한 문제는 학생들의 정서에 미치는 악영향이다. 학생들은 학교 건물의 몇 배가 되는 건물에 포위당한 채 온갖 건설 기자재가 늘어선 지역을 터널처럼 긴 통학로를 거쳐 등하교 한다. 또한 먼지와 소음 때문에 교실 창문 한번 시원스레 열지 못하고 막힌 공간에서 생활한다. 사방 어디를 둘러보아도 고가 크레인, 뼈대를 드러낸 높은 건물, 펄럭이는 잿빛 휘장뿐이고 그나마 드러나는 자연이란 오려낸 것처럼 동그랗게 학교 위에만 펼쳐진 작은 하늘뿐이다. 이런 환경에서 학창시절을 보내는 학생들의 정서가 어떤 모습을 지닐지는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이러한 문제들의 근본 해결은 해당 학교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국가인권위원회에서도 ‘교육인적자원부나 환경부, 행정자치부 등 관계 기관에 재건축 전과정에서 학습 환경권을 보호해야 한다’는 구체적인 권고 사항을 결정했으며, 국정 감사에서 교육인적자원부도 학생 보호 대책의 미흡함을 인정하고 시급한 대책을 강구하겠다고 답변한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관계기관에서는 아직까지도 가시적인 조처를 내놓기는커녕 실태조차 조사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서울 강남 역삼동 진선여중고 학부모들이 지난해 원촌중 학부모들처럼 재건축에 따른 학습권 보호 대책을 요구하며 집단행동에 나섰다고 한다. 게다가 최근에는 집값 폭등으로 재건축에 관한 여러 규제 해제마저도 거론되고 있어서 재건축과 관련된 교육 문제로 사회적 갈등이 더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교육부·환경부·교육청·지자체 등 관계 기관은 이 문제를 더는 방관하지 말아야 한다. 학습권 보호를 위한 제도 미비, 관계 기관의 무관심과 보신주의로 재건축 지역 내의 학생과 교사들은 날마다 무기 없이 전장에 내몰린 병사처럼 위기감 속에서 생활하고 있다. 관계 기관은 지금이라도 시급히 재건축 지역의 교육환경 실상을 정확히 파악하고, 실효성 있는 대책을 세워야 할 것이다.
최근 서울시 교육청은 학교 선택권을 보장하고자 고교 학군 조정에 들어간 것으로 안다. 어떤 기준으로 학생과 학부모의 학교 선택권을 보장할지 모르겠으나, 등교 거부, 배정 거부까지 거론되는 재건축 지역 학교에는 학생들이나 학부모의 의견을 완전히 배제한 채 학생들을 강제로 배정하는 상황에서 새삼 학교 선택권 운운하는 것은 국민을 기만하는 것이다.
김학윤/서울 잠신고 교사·함께하는교육시민모임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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