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냐면
‘예비판사 계층 쏠림 심화’를 우려하는 <한겨레> 기사를 최근 읽었다. 이 기사는 “새로 임관하는 판사 가운데 상류층 또는 중상류층 자녀들이 많이 다니는 서울 강남지역의 고교와 서울의 외국어고 출신자 비율이 해마다 늘어 지난해에는 전체 신임 판사의 3분의 1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며 ‘상류층 가치관이 판결에 미칠 개연성’을 우려하고 있다. 아울러 이를 막으려면 정부가 사법 개혁의 일환으로 도입하고자 하는 법학전문 대학원(로스쿨) 제도에도 일부 보완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있다고 전하고 있다. 나는 이 기사의 문제의식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현대국가의 행정부는 단지 전체 부르주아의 공동사를 관리하는 ‘위원회’에 불과해서는 안 되며, 사회 정의의 최후 보루인 사법부는 더욱 그러해서는 안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 기사는 서울 ㄱ대 법대를 예로 들어 지금 수준의 수업료 수입을 유지하려면 법학전문대학원 한 학기 수업료는 1300만원 이상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한 해면 2600만원, 3년이면 7800만원, 거기에 책값과 용돈과 생활비…. 이건 정말 무늬만 ‘의학전문 대학원’, ‘법학전문 대학원’이지 완전히 ‘돈 전문’ 대학원이지 싶다. 이 정도의 학비를 감당할 수 있는 계층의 사람들에게는 희소식일 수도 있겠다. 특별한 경쟁 없이 수많은 서민의 자식들을 자연스럽게 경쟁에서 배제할 수 있으니까. 돈으로 진입을 봉쇄하는 이 제도가 우리 사회가 그처럼 떠받드는 자유경쟁 원리에 맞는 것인가? 자유민주주의 원리와 개혁의 대의에는 맞나? 개혁은 그 수단과 목적이 동시에 정당성을 가져야 하는데, 이렇게 높은 수업료를 내야 하는 제도를 만들어 놓고는… 그런데 돈으로 진입을 봉쇄하는 이 제도가 우리 사회가 그처럼 떠받드는 자유경쟁 원리에 맞는 것인가? 자유민주주의 원리와 개혁의 대의에는 맞나? 더 충격적인 것은 이 문제와 관련해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가 “로스쿨에 입학한 학생들은 사회적·경제적 지위가 보장되기 때문에 은행에서 학비를 대출받는 방법으로도 구제받을 수 있다”며, 큰 문제가 없을 것으로 보고 있다는 기사를 읽고 나서다. 변호사·의사 등 우리 사회의 몇몇 전문직 종사자들을 ‘허가받은 도둑’이라고 격하게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 현상을 목격하거나, 돈이 없어 병원 문턱도 넘지 못한 어려움을 경험한 사람들의 자조와 원망이 섞인 말이다. 이 말은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실천하는 수많은 의료인과 정의의 여신상 앞에서 한 다짐을 묵묵히 실천하고 있는 많은 법조인들에게는 대단한 모욕으로 들릴 것이다. 그러나 위 기사에 인용된 사개추위의 설명을 들으면 이건 틀림없는 말이 아닌가. 로스쿨에 입학한 학생들은 무조건 돈을 벌 수 있으니 빚 갚는 일 겁내지 말고 외상으로 소 잡아먹으라는 말이 아닌가. 그러고 보니 이해가 된다. 이용훈 대법원장이 대법관 퇴임 후 짧은 기간에 60억원대의 수임료를 받았다는 것이 그에게만 해당하는 스캔들이 아니라는 것이. ‘돈 놓고 돈 먹는 게 자본주의’라고 말하고 싶다면 ‘개혁’을 말하지 말라. 개혁은 그 수단과 목적이 동시에 정당성을 가져야 하는데, 이렇게 높은 수업료를 내야 하는 제도를 만들어 놓고는 정의니, 사회봉사니, 법률 서비스 향상이니 하며 사법개혁을 말하는 건 소가 웃을 얘기 아닌가.150여년 전 빅토르 위고가 쓴 소설 <레 미제라블>에는 이런 글이 나온다. “무지한 인간에게는 되도록 많은 것을 가르쳐 주지 않으면 안 된다. 무료로 교육하지 않는 사회는 죄악이다. 사회는 스스로가 만들어내는 암흑에 책임을 져야 한다.” 노영민/부산 경남공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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