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냐면
1월16일치 ‘왜냐면’에 실린 최경림 외교통상부 FTA 제1교섭관의 글을 읽고 반론한다. 투자자-국가 제소와 관련하여 한정된 지면에서 논하는 것은 무리지만 문제의 핵심을 몇 가지만이라도 짚고자 한다. 첫째, 최 교섭관은 투자자 권리를 구제한다는 국제중재기구의 판정을 ‘표준조항’으로 간주하는데, 그렇다면 그 표준조항이라는 국제중재기구의 실체는 무엇인가. 일종의 국제적 로펌들의 일원으로 구성된 국제중재기구에선 한 명의 중재인과 분쟁 당사자 두 명이 모여서 비밀로 중재가 진행된다. 당사자들의 동의가 없는 한 중재가 벌어지는 장소도 시기도 그러한 중재가 있었는지조차 알 수 없는 비밀주의도 문제지만, 이들 분쟁 당사자들과 중재인이 때로는 당사자 변호인 혹은 중재인으로 자리를 바꾸며 돌고 도는 카르텔을 형성하여 막대한 중재료를 챙기고 있다. 또한 ‘힘이 곧 법’이라는 국제정치에서 최후의 방파제인 국제법의 영향마저 받지 않으며, 이들 셋이 모여 자의적으로 만든 규칙은 공공영역조차도 ‘수용(expropriation)’의 범위를 확대해석하여 국내법마저 휴짓조각으로 만들어 다국적 기업의 승소를 유도하고 있다. 최 교섭관은 이 제도의 수용을 “정부는 규제정책을 최대한 투명하고 공정하게 시행하”기 위해서라고 항변하지만 정작 제소안의 협상 과정은 결코 투명하지도 공정하지도 않다. 국제적 로펌들의 일원으로 구성된 국제중재기구에선 한 명의 중재인과 분쟁 당사자 두 명이 모여서 비밀로 중재가 진행된다. 이들이 모여 자의적으로 만든 규칙은 공공영역조차도 ‘수용’의 범위를 확대해석하여 국내법마저 휴짓조각으로 만들어 다국적 기업의 승소를 유도하고 있다. 둘째, 최 교섭관은 투자자-국가 제소안 수용에 반대하는 이유를 “새삼스럽게 우려가 표명되고 있는 것은 상대가 미국이기 때문이다”라고 단정짓고 있다. 그러나 비단 상대가 미국이기 때문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가령 캐나다의 장례대행 업체가 미국 시장에 진출하여 미국의 국내 장례업자들이 줄도산을 하게 되어 이들의 진출을 막으려 하자 캐나다 업체들이 미국 사법부의 판결에 불복하여 졸지에 미국이 투자자-국가 제소안의 분쟁 당사자가 된 전례가 있다. 미국 내부에서도 이 조항을 바꿔야 한다는 여론이 있음은 물론이다. 문제는 초국경적인 자본이다. 거칠게 말해서 미국은 꼭두각시마냥 자본의 조종 혹은 로비를 받고 있을 뿐이다. 투자자-국가 제소안의 대표적 사건인 ‘벡텔 대 볼리비아 사건’만 보더라도 이러한 극단화된 자본축적의 논리는 수도사업을 접수한 일개 다국적 기업으로 인하여 최저임금이 70달러인 볼리비아에서 서민들은 한 달에 20달러라는 물값을 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했다. ‘물을 사야 할지, 어머니 약을 사야 할지’를 고민해야 할 지경이다. 최 교섭관은 글의 말미에 “우리 투자기업의 이익을 효과적으로 보호할 수 있는 법적 장치를 반대하는 것이 정부가 마땅히 취해야 할 태도인가?”라고 반문했다. 호주, 미국 간의 자유무역협정 체결 과정에서 호주 의회와 국민이 합심하여 투자자-국가 제소안을 철회시킨 사례를 한국 정부에 기대하진 못할망정 기업이익이 국민이 마땅히 누려야 할 기본권보다 결코 우선할 수 없다는 점만큼은 명심해야 할 것이다. 필자가 반론을 쓸 정도로 분노가 치민 것은 “제도의 내용이나 장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한 최 교섭관을 비롯한 참여정부의 엘리트적 오만함 때문이다. 자유무역협정 반대 광고조차도 저지하는 현 노무현 정부의 행태에서 어떻게 온전한 공론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이 글은 홍기빈의 <투자자-국가 직접소송제>(녹색평론 펴냄)에 바탕 했다. 보충설명이 필요하다면 그 책을 일독하길 권한다. 최 교섭관에게 되묻는다. 공공영역까지 침해받을 수 있는 한-미 자유무역협정 협상에서 정부가 마땅히 취해야 할 태도는 무엇인가?황진태/인터넷언론 <대자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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