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7.01.25 17:34
수정 : 2007.01.25 17:34
왜냐면
“군주가 자신의 약속을 지키며 기만책을 쓰지 않고 정직하게 사는 것이 얼마나 찬양받을 만한 것인지를 모든 사람이 알고 있다. 그럼에도 경험에 따르면, 위대한 업적을 성취한 군주들은 자신의 약속을 별로 중시하지 않고 오히려 인간을 혼동시키는 데에 능숙한 인물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신의를 지키는 자들에게 맞서서 항상 승리를 거두었다.”
오백년 전 마키아벨리가 “저는 신분이 낮고 비천한 지위에 있는 사람이 감히 군주의 통치를 논하고 그것에 관한 지침을 제시하는 것이 건방진 소행으로 여겨지지 않기를 희망합니다”라고 하던 <군주론>에 나온 한 대목이다.
‘정략.’ 정치권에서 상대를 폄하하고자 할 때 즐겨 쓰는 말이다. 정략은 정치전략의 줄임말인 듯하다. 정치세력이 권력을 쟁취하여 정치적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정략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이제까지의 우리 정치현실에서 ‘정략’은 사회적으로 허용되는 범위를 자주 넘었고, 사람들은 이제 ‘정략’이라는 말을 들으면 타락한 지도자의 권모술수를 떠올린다.
개헌 문제는 노무현 대통령의 정략인가라는 질문에, 나는 당연히 그렇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지금 논의해야 할 주제는 어느 정당의 정략이 우리 미래를 위해 바람직한 정책인가 하는 것이다.
대통령이 ‘대통령과 국회의원의 임기를 일치시키는 대통령 4년 중임제’ 개헌을 발표한 이후 정치권과 언론에서는 어느 정파가 정략적이냐라는 말싸움에 온통 매달려 있는 것을 보면 실망스럽다. 정치발전을 위해서는 네거티브 전술보다는 정책대결을 해야 한다고 밤낮으로 떠들던 이들이 기회만 되면 상대방에 대해 편견에 기초한 낙인을 찍고 자신의 도덕적 우월을 주장하는 모습은 안타깝기조차 하다.
개헌 문제는 노무현 대통령의 정략인가라는 질문에, 나는 당연히 그렇다고 생각한다. 이에 반대하는 정치세력들의 주장과 행동도 마찬가지다. 정치인이 정략적인 행동을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그 자체가 비윤리적이거나 부패의 상징은 아니다. 우리가 지금 논의해야 할 주제는 어느 정파가 정략적인가라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당의 정략이 우리 미래를 위해 바람직한 정책인가 하는 것이다.
나는 대학 시절 ‘한국 정치의 이해’라는 과목을 수강한 적이 있다. 한국 정치에서 논의되는 쟁점들에 대해서 학생들이 조사·연구하여 발표하는 것이었다. 내가 맡은 주제는 ‘한국 사회에 적합한 권력구조의 모델은 무엇인가’였다. 당시는 ‘국민의 정부’ 시대로 내각제 개헌에 관한 논의가 한창이었다. 하지만 ‘내각제는 권력독점을 막고 책임정치를 구현할 수 있으나 정치적으로 불안정하다’는 이유로 대다수 국민 여론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안정된 정당구조를 가지지 못한 한국 정치의 현실을 반영한 결과였다.
그런데 조사를 하다 보니 대통령제 또한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대통령제와 이원집정부제가 가지는 정치적 불안정성은 의원내각제보다 더욱 위험하고 심각한 것이었다. 그 원인은 ‘이원적 정당성’에 있었다. 두 가지 정부 형태 모두 대통령과 의회가 주권의 주체인 국민으로부터 직접선거에 의해 정당성을 부여받으므로 어느 하나가 우위에 있을 수 없고, 따라서 정치적 목적이 다른 세력이 각각의 권력을 차지하고 대립하면 정치적 불안정을 심화시키고 극한 상황의 경우 쿠데타 등으로 통치권이 붕괴되는 사태를 불러올 수도 있다는 것이다. 우리 현대정치사는 이런 문제점을 잘 보여준다. 이를 해결하는 최선의 방법은 권력융합적인 의원내각제라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하지만 안정적이고 강력한 의원내각제는 안정적인 정당구조를 바탕으로 한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정치현실을 볼 때 의원내각제는 아직 시기상조였다. 그때 나의 고민은 여기까지였다.
“대통령과 국회의원의 임기를 일치시키는 대통령 4년 중임제”라는 골자의 개헌 취지를 밝히는 대통령의 발표를 들었을 때 나의 고민은 일순간 사라졌다. 대통령제의 가장 큰 문제인 이원적 정당성에 기인한 정치 불안정을 제거하면서 안정적이고 강력한 정부를 구성할 수 있고 책임정치 또한 구현할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에서였다. 또한 임기 문제로 인해서 개헌을 한다면 지금이 적기라는 판단도 들었다.
그러나 상황은 엉뚱한 방향으로만 흘러가고 있다. 서로가 서로를 정략적이라고 비판하는 와중에 내용은 사라지고 공허한 울림만 커지고 있다. ‘진실이 술책을 이긴다’는 말이 우리 시대 위대한 정치가의 자서전에서 발견되기를 소망한다.
반은태/충북 음성군 원남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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