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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02.01 18:32 수정 : 2007.02.01 18:32

왜냐면

지난 1월27일 민족문학작가회의 제20차 총회가 열렸다. 백낙청 선생이 평생 동안 쌓았다가는 허물고 다시 쌓던 문학비평의 화두가 ‘민족문학’과 ‘세계문학’이었다. 그런 이론의 실천적인 모습으로 드러난 것, 그의 발의로 만들어졌던, 이 작가들 모임이 벌써 20차 총회를 맞게 되었다. 150여명 회원들이 모인 이 자리에서 안건으로 내세워 열띤 논의가 이루어졌던 내용이 민족문학이라는 단체 이름 속에 든 말 ‘민족’이었다. 세계무대나 국제무대에 이 이름을 들고 나서면 늘 ‘극우 민족주의’라는 오해를 받기 십상이고 국내에서조차 편향된 문학단체라는 오해를 넘어서기가 어려워 젊은 작가들이 기피한다는 것이 그 변경 요청의 가장 큰 까닭이었다.

자아를 지키려고 뭉치자고 외치는 ‘민족’ 집단은 그 이름조차 성스러운 어떤 것, 작가회의 속에 든 ‘민족문학’은 바로 그런 이념을 지닌 것으로 나는 알고 있다.

문학이면 문학이지 왜 하필 민족문학인가? 맞다. 백번 옳은 주장이다. 그런데 실은 이 옳은 주장 속에 음험한 함정이 누워 있다. 그래서 백낙청 선생이 이제까지 써온 저술들 속의 민족문학 옆에는 세계문학이라는 말이 따라 붙는다. 민족을 넘어서는, 종족이나 국가 이념이나 믿음을 넘어서는 사람살이의 바른 길을 찾아 나서는 말길이 문학이라고 누구든 말한다. 문학과 예술의 보편적 가치. 이 얼마나 기막힌 주장인가.

그러나 정말로 그런 순수하고 진짜인, 우주인 모두에게 옳고 맞는, 문학이 있을 수가 있는 것인가. 그리고 문학작품을 쓰는 작가의 눈높이나 그 깊이가 세계인 모두에게 통하는 그런 것이 있는 것인가. 분명 그런 것이 있다. 클로드 란츠만이 만든 영상물 〈쇼아〉를 보면서,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이 쓴 〈수용소 군도〉를 읽으면서, 윤정규의 〈신양반전〉, 김원일의 〈푸른 혼〉, 정찬이 쓴 〈슬픔의 노래〉와 〈완전한 영혼〉을 읽으면서, 또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으면서 독자인 우리는 참을 수 없는 슬픔과 분노, 사람으로 몸된 수치심에 마음이 떨리지 않을 사람이 없다. 거기에는 민족도 믿음도, 지성도 모두 넘어서는 슬픔과 아픔이 있고 한 인간존재로서 지녀야 할 덕목이 무엇인지를 보게 하는 양심이 있다.

양심, 그것은 모든 장벽을 넘어서는 사람됨의 잣대일 터다. 그러나 이 사람됨을 짓밟는 바보들은 있어왔고 그들은 지금도 세계 도처에서 바보짓을 서슴지 않는다. 그것도 모두 국가라는 이름이거나 보기 좋은 어떤 단체의 정당한(?) 이름으로 만들어진 규약, 법규 따위로 몸을 숨긴 채 악은 악대로 사람들을 짓밟아 죽이고 모욕한다. 보편성이라는 말도 그 보호막의 한 꺼풀임을 우리는 잘 안다.

어떤 종족이든 그들이 지닌 문화나 버릇, 믿음은 존중받아야 하고 용훼해서는 안 되는 존엄성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세계를 먹잇감으로 여기는 상품 신들에게는, 못 견딜 고정관념이 된다. 그래서 그들 상품 신들의 노예들은 그런 이름 ‘민족’이야말로 파기해 버려야 할 관념으로 둔갑시켜버렸다. 자아, 나를 지키기 위한 단위의 ‘민족’은 마땅히 보호받아야 한다. 그런 주장조차도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 남을 먹이로 삼으려는 악의로 뭉친 민족이야말로 저주받거나 사라져야 할 거품이지만 자아를 지키려고 뭉치자고 외치는 ‘민족’ 집단은 그 이름조차 성스러운 어떤 것이라고 나는 믿어 의심할 수가 없다. 작가회의 속에 든 ‘민족문학’은 바로 그런 이념을 지닌 것으로 나는 알고 있다. 그것을 바꿀 이유가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정현기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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