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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03.01 21:28 수정 : 2007.03.01 21:28

왜냐면

2월27일치 <한겨레> 칼럼에 ‘무조건 사형제 폐지?’라는 글이 실렸다. 글을 쓴 분의 사회적 무게는 감히 쳐다보기도 어렵다. 하지만 나는 그 분의 글에 동의할 수 없다.

사형제를 폐지하면 극악한 범죄자들을 살려주게 되는 결과를 초래한다고 했다. 여기서 질문을 던져보고 싶다. 살려주면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 범죄율? 사형제도를 폐지하든 안하든 별 차이 없다. 유사할 바에야 죽이자? 혹은 살리자? 근본적인 문제부터 생각해보자.

천인공노할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 있다고 치자. 그 사람을 죽인다고 그 범죄를 돌려놓을 수 있을까? 최소한 범죄 피해자들이 범인이 국가에 의해 살해당했다는 이유로 삶의 피해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그렇지 않다. “범죄를 저지른 사람은 분명 다시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그런 죄인들은 사형에 처해야 사회를 지킬 수 있다.” 이것이 사형제를 주장하는 가장 설득력 있는 근거이다. 그런데 죽이지 않고 사회에서도 격리시킬 방법이 있다면 죽이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 탈출해서 재범한다? 이 확률을 보통의 인간세상에서 극악무도한 범죄가 저질러지는 확률에 비한다면 그렇게 높을까? 아니다.

사회에서 격리시키는 것에도 여러가지 방법이 있다. 죄인을 가두고 그가 사회와 만나지 않게 감시하는 것에는 많은 비용을 든다. 그에 견주어 사형은 간단하다. 하지만, 아무리 싫더라도 한번쯤은 사형을 선고받은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과거 인혁당 사건으로 사형당한 사람들에 대해 국가가 잘못을 시인했지만, 그것을 보상할 방법은 없다.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르는 것은 반인륜적 범죄이나 사형을 한 국가나 마찬가지이다.

죄목이 시대나 사회 상황에 상관 없이 극악무도한 것이라고 치자. 그들은 왜 그런 범죄를 저질렀을까? 개념적으로는 환경적 요인과 유전적 요인으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환경적 요인이라면 그 환경을 좋은 쪽으로 돌려놓기 위해 사회 구성원들이 함께 노력하면 된다. 유전적 요인에 의해서 범죄를 저질렀다면 그는 장애인이다. 인성장애. 사회가 보듬고 갈 수 없을까?

다른 사람을 죽였기 때문에 사형을 한다면 그 사회는 죽지 않았을 피해자의 생명을 존중한다는 뜻이다. 생명이 존중되어야 한다면 백퍼센트 존중하는 것과 반쯤 존중하는 것이 있을 수 없다. 사형제도를 통해서 ‘반쯤 죽일 수’는 없다. 사형에 처한다면 그것은 반, 혹은 백분의 일이라도 존중받을 수 있는 생명을 백퍼센트 죽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사형제도는 논리적인 모순에도 빠진다.

세상 모든 생명이 소중하기는 마찬가지다. 사형수라 해서 뿔 달린 괴물들이 아니다. 그저 매일 일어나는 일상의 일에 기뻐하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하는 사람들이다. 사실 사형 집행관들도 늘 괴로움에 시달린다. ‘알고 보면 나쁜 사람 없다’는 말이 허망한 말인 것을 잘 안다. 그렇더라도 미운 정 고운 정이 든 사람을 죽여야 하는 집행관의 인권은 어떻게 할 것인가?

사형제도를 존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모든 논리에 앞서 사형수와 한 번만이라도 눈을 맞추고 이야기해 본 후에 결론을 내리기를 감히 권유한다. 세상에 죽음과 바꿀 수 있는 것이 있을까? 누가 누구에게 죽으라고 강요할 수 있을까? 적어도 나는 누구도 죽으라고 강요할 수 없을 것 같다.


김선민/건강보험심사평가원 평가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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