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냐면
김용옥 선생이 요한복음 강해를 시작했다. 다방면의 지식과 샘솟는 열정으로 지적 서비스를 제공하는 모습이 보기 좋다. 하지만 그의 지적 서비스가 한국 사회의 갈등과 혼란을 더욱 가중시킬 위험성이 있다고 판단되어 몇 자 적어본다. 그의 강의에는 하나의 주제가 지속적으로 강조된다. 그것은 신비적 세계관에 대한 옹호이다. 세계관은 크게 ‘유한은 무한을 붙잡을 수 있다’고 보는 신비적 세계관과 ‘유한은 무한을 붙잡을 수 없다’고 보는 합리적 세계관으로 분류될 수 있다. 신비적 세계관은 무한에 대한 ‘관념’으로 경험 세계를 ‘구성’하려는 태도를 취하는 반면, 합리적 세계관은 유한성을 자각하고 경험 세계를 ‘관찰’하려는 태도를 취한다. 신비적 세계관에서는 진리에 대한 탐구가 무한한 관념을 성취하려는 노력으로 나타난다. 이런 신비적 세계관은 인간 사회를 운영하는 데 치명적인 결함을 안고 있다. 신비적 세계관은 무한을 성취하려는 노력에 따라 이성주의·구조주의 유형과 반이성주의·실존주의 유형으로 나누어진다. 이성주의·구조주의에서는 진리가 논리적 이성에 의해 영원불변한 구조로 묘사된다. 따라서 인간의 삶을 배후의 구조적 통일성으로 환원하려고 하는 압력이 존재한다. 여기서는 가장 힘 센 선수가 진리라는 이름으로 게임의 규칙을 만들고 심판의 역할까지도 겸하는 독단적인 방식으로 인간 사회를 운영하려고 한다. 한국 사회의 갈등과 혼란은 신비적 세계관이 한국인들의 사고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용옥 선생은 모든 강의에서 신비적 세계관, 특히 반이성주의·실존주의를 고집한다. 이번 요한복음 강해에서도 마찬가지다. 반대로 반이성주의·실존주의에서는 진리를 끊임없이 운동하고 변화하는 모습으로 묘사하면서 논리적 이성으로 진리를 파악하려는 노력을 부정하고 실존적 체험을 통해 진리를 느끼려고 한다. 따라서 인간의 삶을 배후의 해체적 다양성으로 환원시키려는 압력이 존재한다. 여기서는 이성주의·구조주의에서 강요되는 엉터리 게임에 염증을 느끼고 일체의 경기 규칙을 부정하면서 모든 선수가 심판이 되어 제멋대로 게임을 하는 방식으로 인간 사회를 운영하려고 한다. 이런 이유로 신비적 세계관의 인간 사회는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다. 신비적 세계관의 사회는 입으로 평화를 열망하고 외쳐도 격렬한 갈등상태에 빠지게 된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온건주의는 사라지고 이상주의와 냉소주의가 득세하게 된다. 한국 사회의 갈등과 혼란은 신비적 세계관이 한국인들의 사고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용옥 선생은 모든 강의에서 신비적 세계관, 특히 반이성주의·실존주의를 고집한다. 이번 요한복음 강해에서도 마찬가지다. 요한복음의 로고스를 헤라클레이토스의 로고스와 동일시하는 점(헤라클레이토스의 로고스는 노자의 ‘도’와 매우 유사한 것으로 끊임없이 변화하고 운동하는 실체다), 율법과 구약의 폐기를 주장하는 점, 하나님이 일한다는 성경의 말씀을 천지의 끊임없는 변화와 등치시키는 점 등이 그러하다. 율법주의적 독단주의를 비판하는 그의 태도가 옳다 하더라도 율법을 폐기하려는 태도는 잘못이다. 굳이 성경을 논하지 않더라도 상식적으로 인간 사회에서 법을 없애려고 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다. 합리적 세계관은 누구도 법 위에 설 수 없다는 법치를 인간 사회의 기본 환경으로 설정한다. 타락 이전 에덴동산에서 다른 과일은 다 먹어도 선악과만 먹지 말라고 한 하나님의 명령은 곧 하나님=심판, 선악과=규칙(법), 아담과 이브=선수라는 도식을 분명히 제시함으로써 합리적 세계관의 법치 이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기독교인들 중에서도 이성주의·구조주의 세계관으로 성경을 읽는 사람들이 있고, 반이성주의·실존주의 세계관으로 성경을 읽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성경의 기독교는 좌로도 우로도 치우치지 않는 합리적 세계관을 보여준다.윤원근/동감기독교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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