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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05.28 18:29 수정 : 2007.05.28 18:29

왜냐면

나는 공식 일정과 별도로 칠레사회보장협회(ACHS), 칠레사회보험국(INP), 브라질 사회보장청, 아르헨티나의 사회보장청과 약속을 하고 개인 일정을 짜서 남미 연수에 참가했던 국민연금관리공단의 감사다. 공기관 최초의 공인회계사 출신 감사이고 최초의 여성 감사이기도 하다. 내가 남미에 갔던 이유는 세계적으로 독특하게 민영화돼 있는 칠레의 연금제도를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영사까지 동원하여 잡은 약속이고 별도 통역도 준비했다. 졸지에 ‘이구아수 감사’가 되었으나, 논란이 된 김에 1년5개월 동안의 감사 경험을 바탕으로 공기관 감사제도에 대해 한마디 하고자 한다.

“공기관의 감사는 한가하다.” “권한만 있고 책임은 없다.” 맞는 말이다. 이유는 보증책임을 지우지 않기 때문이다. 통상 외부 감사인은 “중요성의 관점에서 적정하게 표시되어 있다고 확신합니다”라는 식으로 인증 표현을 한다. 그런데 공기관 내부 감사의 감사 보고는 지적 사항의 나열과 그 근거를 제시하는 정도의 수준이다. 100개의 문제가 있는데 10개만을 지적한 것인지, 10개의 문제 중 10개를 모두 지적한 것인지 알 수 없는 보고가 대부분이다. 무엇이 문제라고 말하는 것과 무엇이 문제없다고 말하는 것은 전혀 다른 말이며, 해야 할 일의 수준도 전혀 다르다. 문제를 발견하는 데 10의 노력이 든다면 문제없음까지 보증하는 데는 100의 노력이 든다. 회계법인들이 적정 보고를 했다가 나중에 문제가 발견되어 각종 소송에 시달리고 있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나는 국민연금 200조의 기금 운용에 대해 “지적한 것 이외에는 적정하다”고 보고하느라 머리가 핑핑 돌 지경이었다.

‘문제없음’까지 보증책임을 지우면 감사는 눈을 부릅뜨고 일해야 한다. 독립성이 보장돼야 제대로 말할 수 있고 국회 상임위 감사보고 의무화하면 국감으로 업무가 마비되는 일도 없을 것이다.

감사가 지적사항 10개를 냈다고 책임을 다한 것으로 보지 말고 감사 대상 기관의 나머지 활동이 적정했음을 보증시켜야 한다. 그러면 한가할 수가 없다. 대리인인 감사실 직원들이 제대로 모니터링하는지, 중간에서 정보를 잘라먹지는 않는지, 어떤 수위까지 보증할지 눈을 부릅뜨고 지켜볼 수밖에 없다. 업무 전문성은 물론이고 보증에 따른 위험관리를 위한 감사 지식이 필수가 되어 아무나 공기관 감사를 할 수 없게 된다.

감사가 제대로 일하도록 하기 위한 또 하나의 요건은 독립성이다. 공기관들, 특히 산하 기관들이 정부의 주무 부처로부터 독립적이지 못하다는 사실은 세상이 다 아는 일이다. 대통령-장관-기관장은 집행의 통일성을 기하기 위해 한 몸처럼 움직이는 게 당연하다. 그 구조에 감사까지 매여야 하겠는가? 이런 점에서 최근 기획예산처가 감사 인사에 개입하여 주무 부처로부터 독립시킨 것은 상대적으로 바람직한 방향으로 보인다.

‘보고, 말하는 게 하는 일의 전부’인 감사들이 제대로 일하게 하려면 독립적으로 말할 수 있고 보호받을 수 있는 보고처가 있어야 한다. 민간 출신 감사가 아무 정치적 편견 없이 실무적 타당성과 실질적인 관점에서 정부정책의 문제점을 느낄 때 이 문제를 보고할 곳이 아무 데도 없다. 장관의 직무행위가 타당성이 없다고 감사가 장관에게 보고할 수 있겠는가?

우리 사회에선 구체적인 실행업무로부터 확인되는 정책 타당성에 대한 정보가 국민들에게 부족한 실정이다. 공기관의 직원들은 정책이 잘못되었음을 몰라서가 아니라 독립되어 있지 않아 말을 하지 못한다. 이럴 때 독립된 감사가 얼마나 요긴하겠는가? 독립적으로 말할 수 있게 국회 상임위에 감사보고를 의무화하고, 시민단체나 국회가 감사를 일상적 정보 확보의 끈으로 활용하면 감사들이 제구실을 다하도록 할 수 있다. 국회의원들이 기관의 상근 감사를 통한 상시적 정보시스템을 기반으로 하여 국정감사를 하면, 국감으로 1년에 4개월 이상 업무가 마비되는 공기관의 애로도 풀어주면서 의원들의 감사활동도 훨씬 효과적으로 바뀌게 될 것이다.

감사에게 보증책임을 지우고 독립적으로 말하게 하라. 그러면 감사는 ‘신이 내린 환상의 한직’이 아니라 ‘국민을 위해 복무하고 국가기구의 병폐를 바로잡는 핵심고리’로 기능할 것이다.


노금선/국민연금관리공단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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