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냐면
세계적으로 유래를 찾을 수 없는 조종사 비정규직 시대가 열리고 있다. 노동부가 지난 5월17일 확정한 비정규직 관련법 시행령에서 기간제 예외조항에 조종사가 추가됐기 때문이다. 시행령이 시행되는 7월1일부터는 비정규직 조종사가 서서히 늘어날 것이다. 비행 안전이 걱정스럽다. 항공사 관계자들은 조종사가 아무리 비정규직이라도 철저한 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아무 문제없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일반 승객이 타는 비행기는 안전을 위해 정규직 조종사들이 몰고, 그들이 타는 비행기는 모두 비정규직이 맡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해 보면 고개를 흔들 것이 분명하다. 비행 안전에는 조종사의 실력뿐 아니라 비행에 임하는 조종사의 심리 상태나 그들이 처한 객관적인 조건도 중요한 변수라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다.대부분의 사람들은 1997년 괌에서 일어난 끔찍한 사고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사고의 주요한 원인 중 하나가 항공사의 무리한 스케줄 운영 때문이었음을 알고 있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런데 저녁 8시 정도에 출발하여 밤을 꼬박 샌 후 다음날 7시께 돌아오는 당시의 일정을 소화해야 했던 조종사들은 이런 사실을 잊을 수가 없다. 사고 이후 대한항공은 노조와 교섭을 통해 날밤을 꼬박 새는 일정을 대부분 바꾸었다. 그리고 99년 이후 단 한건의 인명사고도 없는 자랑스러운 항공사가 되었다.
비정규직 기간제 예외조항에
시행령 확정하며 난데없이 추가
승객 목숨이 걸린 항공 안전을 무시한 처사
괌사고의 악몽을 잊었나
대한항공이 97년 이전에 그런 무리한 일정을 유지했던 이유는 안전에 대한 무지와 방심 때문이었다. 당시에 운영되던 스케줄에 대해 조종사들은 위험하다고 주장했지만 항공사는 그런 조종사들의 생각쯤은 간단히 무시해 버렸다. 이제 조종사의 절대 다수가 비정규직이 된다면 똑같은 일이 다시 벌어질 가능성이 아주 높다. 물론 조종사 개인이나 조종사노동조합에서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피나는 노력을 할 것이다. 하지만 이게 어디 힘없는 개인이 말을 한다고 바뀌어지는 문제도 아니고, 온갖 악법으로 손발 다 묶어 놓아 뛰고 움츠리기도 힘든 노동조합에서 해결하는 데도 한계가 있을 것이다. 게다가 앞으로 들어올 비정규직 조종사들은 노동조합에 가입해 문제를 해결하려 하기보다는 회사의 눈치를 봐야 하는 고용이 불안정한 상태로 일할 것이기에 향후 사태를 결코 낙관할 수 없다.
조종사를 영구히 비정규직으로 남겨 놓을 수 있는 이번 노동부의 결정은 항공 안전이라는 요소를 완전히 무시한 채 졸속으로 진행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한겨레> 5월28일치 13면) 노동부는 지난 4월19일 입법예고될 당시에는 없었던 조종사들을 갑자기 그 대상에 포함시킨 것은 물론이고, 원천적으로 취업이 불가능한 자가용 조종사까지 비정규직의 대상으로 포함시키는 무리수를 두었다. 노동부가 항공 안전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재정경제부나 현장에서 승객의 안전을 책임질 수 있는 조종사 한 명도 없는 항공대학교의 자문만으로 그런 결정을 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사실 노동부는 항상 노동자의 삶은 안중에도 두지 않는 그런 결정을 해왔기 때문에 별 놀라울 것도 없다. 분명 노동부는 파업이나 해대는 골치 아픈 조종사들의 손발을 더 꽁꽁 묶어 달라는 항공사나 경총 등의 말만 듣고 승객의 안전을 현장에서 담당하는 노동자들의 역할은 철저히 무시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종사들과 조종사노동조합은 지금의 현실을 인정만 하고 갈 수는 없다. 사람의 목숨이 걸린 문제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열악한 조건에서도 끝까지 최선을 다했던 우리 선배들과 마찬가지로 승객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모든 부당함과 맞서 싸워야 할 것이다. 이것은 이 땅의 모든 노동자들이 똑같이 안고 있는 숙명과도 같은 것이기에 조종사라고 해서 결코 예외일 수는 없다. 함께 연대하여 돈보다는 사람의 목숨과 삶을 중히 여기는 세상으로 바꾸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승객들이 조종사가 비정규직인지 아닌지 확인하고 타야 하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원래대로 되돌려 놓아야 할 것이다.
하효열/대한항공 전 조종사노조 조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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