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냐면
조국 근대화 40년, 1964년 79달러였던 1인당 국민총생산(GNP)은 200배나 불어 2만달러가 눈앞이다. 민주화 운동 20년, 거리의 투사를 대통령으로, 남편 옥바라지하던 새댁을 총리로 만들었다. 그러나 눈부시게 성장한 이 땅에 노예처럼 버려진 800만 비정규 노동자가 거리를 배회하고 있다. 이들은 70년 11월 전태일의 등신불처럼, 80년 남동임해공업단지의 공돌이처럼, 서울 가리봉동 쪽방촌 어딘가에 몸을 누이던 공순이 대신, 한국 사회의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20년 전 이들과 어깨를 겯고 함께 한국 사회를 바꾸자던 사람들이 청와대로, 장관으로, 공기업 사장이 돼 검은 세단 뒷자리에서 나라를 주무르지만, 1500만 노동자의 삶은 나아진 것이 없다. 외환위기 10년, 민주화 세력이 무려 9년 동안 집권했지만 2 대 8의 양극화는 골만 깊어졌다. 9년 동안 집권 세력이 내놓은 해결책은, 가난한 이는 더 가난하게, 부유한 이는 더 부유하게 만드는 정책과 법제도밖에 없다. 엊그제 시행된 ‘비정규직 보호법’은 그 이름과 정반대로, 곳곳에서 비정규 노동자의 목을 자르고 있다. 뉴코아에서, 홈에버에서, 철도공사(코레일)에서, 백년대계라는 학교에서, 심지어는 해결책을 내놔야 할 노동부에서 십수년을 비정규직으로 일한 노동자가 ‘비정규직 보호법’ 때문에 쫓겨나고 있다. 인권 변호사가 대통령으로, 또다른 인권 변호사는 노동부 장관이 된 나라에서 비정규직 문제는 선거용 미사여구에 불과했다. 정부 통계로도 비정규직은 임금노동자의 37%인 577만명에 이른다. 이들의 월급은 127만원으로 정규직의 64%에 불과하다. 국민연금·건강보험 등 사회보험 가입률도 40%에 그친다. 이런 나라에서 월드컵을 하면 뭐 하고, 이런 나라에서 겨울올림픽을 유치하면 뭐 하나. 민주화 세력이 집권한 나라에서 국민들은 비정규직이란 이름으로 십자가에 매달려 10년의 세월을 보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다. 혹자는 기업이 성장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한다. 성장과 이윤 창출만이 지고지선의 가치로 둔갑했다. 그러나 유한킴벌리의 문국현 사장은 “20년 전 230만명을 직·간접 고용했던 30대 재벌은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돈을 긁어모은 오늘, 고작 130만명을 고용하고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고용 없는 성장이 10년째 뿌리내린 이 땅에서 여전히 성장만을 떠들어대는 정치인만 즐비하다. 성장과 이윤이라는 가치에 희생돼비정규직이란 이름으로 십자가에 매달려
10년의 고난세월을 보냈지만
보호법이란 이름 아래 되레 쫓겨나고 있다
이제 비정규직 해소만이 신 성장동력 한국 땅에서 ‘비정규 노동자’는 화두가 된 지 오래다. 2∼3년만 허리띠를 졸라매면 일하는 노동자가 잘사는 나라를 만들겠다던 전직 대통령은 아직도 일산 호수공원 어디쯤에서 대선 후보들의 큰절을 받고 앉았다. 5년 전 혜화동 로터리에서 눈물까지 쥐어짜며 비정규직의 피눈물을 닦아주겠다던 노무현 대통령 후보는 집권 4년 동안 비정규직의 주머니를 털어 재벌의 배만 불려왔다. 케이티엑스·새마을호 승무원들의 싸움은 비정규 노동자의 상징이 된 지 오래다. 이들의 비정규직 철폐와 직접고용 요구는 21세기 한국 사회의 상징이다. 7월13일, 케이티엑스 승무원들의 정규직화 외침이 500일을 맞는다. 이들을 그대로 둔 채 이 땅에서 비정규직 문제를 말할 수 없다. 세계는 지금 한국 사회가 내부에 갈라진 양극화의 고리를 끊고 재도약할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을지 주목한다. 노무현 정부는 정보통신기술(IT) 산업이나 영화·드라마 등 문화산업을 신성장동력이라지만, 비정규직 해소가 이 나라의 진짜 신성장동력이다. 이 나라의 발전은 해방 이후 60년 동안 줄곧 ‘성장’만이 살길이라고 외쳐대던 경제학자와 낡은 관료와 정치 모리배들이 이룬 게 아니다. 경제성장의 결과가 화해할 수 없는 양극화를 낳았다면 이제 양극화에 천착해야 한다. 재벌 경제연구소조차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이야기하고 있다. 살기 위해 1년 4개월을 거리에서 싸운 케이티엑스·새마을호 승무원들이 역설적이게도 곡기를 끊고 단식중이다. 정치권과 관료들은 양극화 해소 전략이 거창한 프로젝트나 선거 공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서 출발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정호/민주노총 공공운수연맹 정책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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