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07.08.20 18:00 수정 : 2007.08.20 18:00

왜냐면

동서화합이라는 명분으로 만든 도로
부실공사 후유증 고스란히 떠안아
16년간 평균치사율 31.7%
오죽하면 인권위에 기대겠는가

지난 7월30일 호남·영남 주민 대표 다섯명이 국가인권위원회를 찾았다. 88고속도로가 국민의 인권을 심각하게 침해하기에 이를 바로잡아 달라고 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길과 인권이 무슨 상관 있어’ 싶은 이들이 많은 모양이다. <한겨레>도 관련 보도가 없는 것을 보니 마찬가지로 생각했지 싶다.

알다시피 88고속도로는 국민을 학살하고 권력을 탈취한 정권이 제 잘못을 감추기 위해 만든 길이다. 동서 화합을 내세우며 1980년 광주에서의 학살이 흡사 지역 간의 불화에서 비롯된 듯이 여론을 호도한 것이다. 게다가 당시에는 기술도 생소한 시멘트로 만들었는데 이때 전두환씨의 후견인이자 아주 가까운 인척이 한국양회공업협회장으로 있었으니 부실투성이 도로의 탄생은 어쩌면 당연했다.

하지만 만들어진 과정이야 어찌되었든 영남·호남의 주민들은 이 길을 통해 생계를 이어가고 서로에 대한 이해를 높이며 화합을 다져왔다. 거창의 사과가 광주 공판장에서 칙사 대접을 받았고, 나주의 홍어가 영남인의 막힌 가슴을 뚫어주었다. 그렇다. 길은 교류이자 소통이며, 이해이자 화합이다. 사람을, 문화를, 사상을 이어주는 것이 길이고, 88고속도로는 아쉬우나마 호남·영남 사이에서 그 구실을 맡아왔다.

그런데 지역의 마음을 이어주는 이 길이 정작 이 지역 사람들에게 우환 덩어리가 되었다. 안타깝지 않은 죽음이 어디 있으랴만 이 길에는 사연 많은 죽음이 유독 많다. 일가족 참사라든지 어린 자식만 남기고 부모가 숨지는 따위의 사고가 많은 것이다. 이는 도로시설이 안전 기준에도 미치지 못함에도 생계를 잇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길을 다녀야만 하는 지역 실정 때문이다.

세계인권선언은 세번째 항목에서 “모든 사람은 생명권과 신체의 자유와 안전을 누릴 권리가 있다”고 했다. 그런데 지난 16년(1990∼2005) 동안 88고속도로의 평균 치사율은 31.7%로 우리나라 고속도로의 평균 11.6%,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자동차전용도로의 8.2%보다 3배, 4배가 높다.

이처럼 치사율이 높은 것은 이 길이 이름은 고속도로이지만 실제로는 고속도로가 아니기 때문이다. 고속도로이기 위해서 법으로 규정한 최소의 시설 기준(중앙분리대 설치, 입체교차로, 시속 80㎞ 이상, 2∼3m 이상의 길어깨, 최대 경사도 6%, 오르막차로 설치 따위)에도 훨씬 못미치는 탓이다. 법으로 고속도로가 맞네 아니네 따지기에 앞서 안전을 위한 최소요건조차 갖추지 못했으니 이 지역 주민들은 국가에 의해 죽음으로 내몰리고 있는 셈이다. 생명과 신체의 안전을 심각하게 위협당하면서도 생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 길을 다녀야 한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이주노동자를 비롯하여 이 나라와 관련된 모든 사람들의 인권을 보호하고 그 수준을 높이기 위한 기구다. 즉 인권에 대한 개념을 확장시키고 앞장서 이끌어내기도 해야 한다. 그 속에는 생명과 신체의 안전에 대한 인식의 폭을 넓히는 것도 포함된다. 그렇다면 이 지역 주민들이 인간이기 위한 가장 바탕 되는 권리 중 하나인 안전을 위해 국가인권위원회에 기대는 것은 당연하다 못해 오히려 서글픈 것 아닌가? 이 서글픈 현실이 ‘88고속도로 안전성 확보와 정상화를 위한 국민연대’가 인권위를 찾은 까닭이다. 인권위의 현명한 판단을 기대한다.

이상재/‘함께하는 거창’ 정책위원장

광고

브랜드 링크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