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냐면
2·13 합의에 따라 북한이 영변 핵시설을 폐쇄한 것을 1단계, 모든 핵시설 신고와 불능화를 2단계, 그리고 평화조약 체결과 북-미 관계 정상화를 3단계라고 본다면, 2·13 합의의 제2단계도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 같다. 북한의 모든 핵시설 신고와 불능화에 상응하는 미국의 ‘테러지원국 해제, 적성국교역법 적용 종료’가 연내에 이행될 것으로 기대된다. 그러나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이 3월5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아펙) 한-미 정상회담에서 노무현 대통령에게 공언한 제3단계까지 가는 데는 엄청나게 어려운 장애물을 넘어야 한다. 우선 북한이 2006년 10월9일 핵실험을 한 것으로 보아 이미 소량의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명백한데, 2·13 합의문 어디서도 소량의 핵무기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으며 북한이 핵 프로그램 리스트에 올릴 의지를 보여주지 않고 있다. 2·13 합의문을 잘 읽어보면 ‘불능화’는 시설과 장비를 말하는 것이지 북한이 보유한 소량의 핵무기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며 ‘불능화’와 ‘비핵화’를 구별하고 있다. 그동안 미국이 끈질기게 문제시해온 고농축 우라늄(HEU) 방식의 핵개발 프로그램은 ‘불능화’ 대상에 포함될 수가 있다. 북한이 원심분리기 등의 우라늄 농축 장비를 파키스탄으로부터 수입해온 증거를 미국이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데 대한 모종의 설명이 필요하다. 그동안 미국 내에서도 북한이 고농축 우라늄 생산까지는 가지 못하고 저농축 우라늄(LEU) 수준에 머물러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논의가 있었다. 올해 초 미국 정보당국은 의회 청문회에서 북한에 고농축 우라늄 개발 계획이 있는지 확실히 말할 수는 없다고 인정한 바 있다. 따라서 미국이 확실한 증거를 갖고 있다고 주장하는 원심분리기를 위시한 농축 장비를, 핵폐기와 보상을 동시에 진행하는 ‘우크라이나 모델’에 따라 미국에 팔아넘길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고 본다. ‘2·13’ 핵불능화 2단계 실현후3단계 시나리오 변수 많지만
남북관계가 북-미 관계에 종속돼선 안된다
우리민족끼리 통일 원한다면
군축 논의 성의껏 해야 제3단계에 들어가면 북한은 이미 보유하고 있는 소량의 핵무기까지 포기하는 ‘비핵화’를 가지고 미국과 협상을 시작할 것이다. 북한은 북-미 관계가 정상화될 때까지는 결코 소량의 핵무기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불능화’가 이행된 마당에 북한은 2·13 합의를 성실히 이행하였다고 주장할 것이다. 만약 미국이 소량의 핵무기까지 북한한테 폐기할 것을 요구한다면 북-미 관계 정상화를 매듭짓자고 나올 것이다. 나아가 북한은 주한미군 철수 문제와 한-미 동맹의 파기까지 요구하고 나올 것이 뻔하다. 미국은 이러한 북한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가 없을 것이다. 미국은 동북아의 안보를 위해서, 즉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서도 주한미군을 철수할 수 없다는 이유로 한-미 동맹의 파기는 결코 있을 수 없다는 주장으로 맞설 것이다. 이렇게 되면 북한이 보유한 소량의 핵무기와 핵무기 유입이 가능한 주한미군의 억제력이 힘의 균형을 이루게 된다. 2·13 제2단계 이후에는 북한이 ‘불능화’를 이행했고 핵무기를 제3국이나 테러리스트들에게 이전하지 않는 한 북-미 양국은 힘의 균형 상태로 현상유지를 해나가려고 할지도 모른다.
아니면 미국이 북-미 관계 정상화까지 밀고 나갈 수도 있다. 한반도 평화체제를 구축하기 위해서 한-미 동맹을 파기하고 북-미 관계 정상화를 추진할 수도 있다. 이 경우 이미 착수한 주한미군의 후방 배치를 가속화하고 주한미군의 임무를 ‘동북아 평화유지군’으로 바꾸면서 북한에 ‘비핵화’를 요구하며 관계정상화를 수용할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고 본다. 사실 북한은 ‘주한미군 철수’라는 선언적 정책과는 달리 내심 중국을 견제할 수 있는 미군이 남한에 주둔하기를 원할지도 모른다. 이와 같이 북-미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면 평화조약과 북-미 관계 정상화가 현실로 다가오게 되며 북한의 ‘비핵화’가 실현될 수도 있다. 이와 같이 한-미 동맹이 파기되거나 주한미군의 지위가 바뀌는 것을 남한이 찬성하든 반대하든 2·13 합의는 제2단계 이후 중단되거나 나아가 제3단계까지 진전될 가능성은 있다고 본다. 따라서 남북관계가 북-미 관계의 종속변수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며 남북간 경제 교류·협력과 ‘햇볕정책’은 더욱 가속화해야 한다. 이 시점에서 남북의 평화체제 선언이나 ‘남북 연합제’ 혹은 ‘낮은 단계의 연방제’ 등의 통일방안이 논의되는 것도 바람직해 보인다. 그러나 가장 우선적으로 남북한은 재래식 무기 감축부터 논의해야 할 것이다. 북한이 핵문제를 해결하고 난 뒤 ‘우리 민족끼리’ 평화적으로 통합하는 것을 진실로 원한다면 재래식 군비 감축 문제에 성의를 보여야 할 것이다. 만약 10월 초 남북 정상회담에서 논의될 것으로 예상되는 서해북방한계선(NLL) 문제가 전반적인 군축 논의와 연계될 수 있다면 ‘영토 개념’이 아니라 ‘안보 개념’으로 보는 것도 전향적인 발상으로 보인다. 이런 의미에서 남북 정상회담에서는 남북간 군축 문제가 성심성의껏 논의되기를 기대해 본다. 이강석 국방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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