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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12.03 18:54 수정 : 2007.12.03 18:54

왜냐면

신의성실의 원칙은 믿음과 정의를 아루른 법이념
정의롭지 못한 관계에서 믿음 지키라고 요구하면 신의 아닐 뿐더러 중대한 죄악
국가와 사회의 번영을 위해 대규모 비리 공개한 것이 어찌 배신인가

최근 삼성 법무팀장 출신 김용철 변호사가 네 차례 기자회견을 열어 삼성의 구조적 비리를 폭로해 세상이 떠들썩하다. 근데 잘했다고 용기를 가상하게 여기는 찬탄 못지 않게, 개인 약점을 들추며 법률 전문가로서 기업비밀을 누설한 배신자라고 비난하는 수군거림도 제법 요란하다고 한다. 게다가 대한변협에서는 변호사로서 직업윤리를 저버렸다고 징계를 거론하고, 심지어 ‘전라도 배신’을 비난하며 왕건의 ‘훈요십조’까지 언급한다고 한다.

세상에 아무리 삼성이 국가 경제발전의 일등공신이고 세계 유수의 기업에 끼어 국위와 국부를 선양한다고 해도 기업의 공공성과 사회책무를 도외시한 엄청난 비리를 어떻게 기업비밀로 보장한단 말인가? 게다가 주식을 공개한 기업을 대주주 경영자 일가의 소유물처럼 동일시한단 말인가? 세상이 아무리 황금만능주의 시대가 되었다고 해도, 어떻게 공적 윤리와 사적 비리를 가리지 않고, 신의와 배신도 분간하지 못한단 말인가?

우선, 전문 법조인 출신인 동료 교수들의 견해로, 법률사무소 운영자로서 손님의 의뢰를 받아 독립적으로 수임사무를 처리하는 개업 변호사의 고객비밀 유지 의무와, 기업 법무부서의 직원으로 경영자의 지시에 복종할 의무가 있는 피용자의 기업비밀 유지 의무는 법적 성격이 다르기 때문에, 적어도 변협에서 변호사윤리 위반을 이유로 징계를 운위하는 것은 얼토당토 않은 비전문적 망언이라는 것이다. 지켜야 할 법조윤리는 망각하면서, 집단이익을 위해 기업비리를 두둔하는 적반하장으로 의심받을 만하다.

또, 믿음에 대해 일반인들이 공사를 분간하지 못한 채 크게 오해하고 있다. 전통 윤리에서 믿음은 대등한 벗 사이에 지켜야 할 도덕이다. 개업 변호사로서 손님의 수임을 받은 대등한 계약관계의 경우 이러한 믿음을 지켜야 하리라. 그러나 대기업의 한 직원으로 고용된 법률 전문가는, 명령에 복종하는 주종관계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오히려 ‘군신간의 도의’에 가깝다. 현대 법의 이념으로 보자면, 그 첫 번째로 꼽히는 것이 ‘정의’(正義)다. ‘믿음’은 법의 이념에서 ‘법적 안정성’의 요소로서, 거래의 안전과 선의의 제3자 보호를 위한 법 자체의 공신성으로 이어진다. 어디까지나 실체정의가 첫째고, 법적 안정성은 부차적 절차정의다.

민법이 기본원리로 선언한 ‘신의성실의 원칙’은 바로 ‘믿음(법적 안정성)과 정의’를 함께 아우른 법이념이다. 정의로운 약속을 저버리는 식언도 신의가 아니지만, 정의롭지 못한 관계에서 믿음만 지키라고 요구해도 ‘신의’가 아니다. 예컨대, 공공성이 전혀 없는 순수한 사적 자치의 계약일지라도, 도박이나 인신매매는 사회정의에 반하기에, 민법상 무효일 뿐만 아니라 형사상 범죄로 처벌한다. 그런 믿음은 지킬 필요가 없으며, 지켜서는 안 되는 중대한 죄악이다. 하물며 공공성이 큰 대기업 내부에서 불의의 죄악을 오랫동안 은밀히 조직적으로 저질러 왔는데, 국가사회와 기업 자체의 건전한 번영을 위해 대규모 비리를 공개한 것이 어째서 비난받을 배신인가? 정부기관이나 공기업의 비리부패는 포상과 신분보장을 내걸어 내부고발을 장려하지 않는가! 중국과 대만에서는 아무리 작은 회사라도 모두 ‘공사’(公司)라고 부른다. ‘공공을 위해 공적으로 맡은 산업’이란 뜻이다. 하물며 삼성 같은 대기업이 ‘공사’가 아니랴?

공자는 “믿음이 정의에 가까우면 말을 반복할 만하고, 공경이 예절에 가까우면 치욕을 멀리하며, 의지함에 친근할 만한 이를 잃지 않으면 종주로 삼을 만하다”고 말했다. 곧, 정의로운 믿음(계약)은 실천으로 지켜야 하고, 예절에 지나친 공경은 치욕을 부르므로 비굴하게 아부해서는 안 되며, 의롭지 못한 사람한테 빌붙으면 자신의 영혼을 팔아먹게 된다.


또 공자는 “잘못이 있으면서 고치지 않는 게 진짜 잘못이므로, 잘못이 있으면 안으로 스스로 반성비판하고, 남들이 알게 드러내며 고치기를 거리끼지 말라”고 가르친다. 김용철 변호사의 참회와 비리 폭로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에 부합한다. 또 진정 국가사회와 삼성 자체를 사랑하고 위하는 어진 마음에서, 온갖 비난과 위협을 무릅쓰고 고귀한 용기를 발휘한 의거라 칭찬할 만하다.

대권후보가 온갖 부정비리 의혹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경제능력 때문에 높은 지지율을 유지하는 현상이나, 대기업의 엄청난 구조적 비리를 폭로한 사람을 도리어 배신으로 매도하고 역사와 지역감정까지 들먹이는 여론 행태를 보노라면, 국민정신이 멍들고 민족정기가 쇠퇴하는 것은 아닌지 몹시 걱정스럽다.

김지수/전남대 법대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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