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냐면
뚜렷한 교육목표를 정하고언어규칙성에 민감한 인간의 언어능력을 존중하면서
생각을 말할 수 있는 창의적 교육환경을 조성해야 만시지감은 있지만, 요즘처럼 영어교육에 대한 열띤 논의는 일단은 환영이다. 이번에는 좀 획기적인 돌파구가 마련될까? 그런데, 아직은 무엇이 어떻게, 그리고 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사실, ‘언어’란 아동의 인지발달과 문화적 환경이 총체적으로 적절히 융합될 때 긍정적 발달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에, 영어교육방안은 어떤 이론가와 정책가가 책임을 맡건 무거운 숙제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요즘, 각계각층 전문가들의 관심과 의견을 대하면서 한 가지 문제점을 깨닫게 되었다. 영어교육의 방법에 대한 의견은 분분한데, 아직 많은 사람들은 교육목표와 언어습득의 본질에 대해서는 제각기 서로 다른 생각을 갖고 있거나, 또는 깊게 숙고하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이다. 개혁의 당위성도 중요하지만 영어교육의 목표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살펴야 한다. 교재와 교사의 질적 향상, 그리고 앞으로 몇 해 뒤의 입시 대책은 거듭 거론되고 있지만, 이런 대안들이 영어교육의 무슨 목적을 위한 것인지는 별로 얘기하는 사람이 없다. 이명박 당선인의 생각처럼 “특히 생활 속에 살아 있는 영어”를 강조하는 것이 목적인가, 아니면 “개인과 국가의 경쟁력”을 키우기 위한 비즈니스 영어교육이 목적인가, 아니면 영어표기법을 획기적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공표할 정도로 발음교육을 시급한 과제로 채택하자는 얘기인가? 앞으로 몇 해 뒤부터는 듣기와 읽기만을, 그리고 점차적으로 쓰기와 말하기를 입시 과목으로 추가한다고 하는데, 처음에는 듣기와 읽기 능력을 평가하면서 쓰기와 말하기를 제외한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의 두뇌는 의미 있는 의사소통을 효율적으로 하기 위하여 네 가지 능력을 융합적으로 처리하는데 말이다. 목적이 불분명한 방안이나 개혁은 승산 없는 낭비다. 언어교육 방법을 생각하기 전에 우선 언어습득의 본질을 숙고해야 한다. 인간의 언어습득 능력은 침팬지가 수화를 배우는 정도의 수준이 절대로 아니다. ‘orange’를 ‘오렌지’라고 표기하건 ‘오린지’라고 하건, ‘friendly’를 ‘프렌들리’로 쓰건 ‘후렌들리’로 하건, 국어표기법은 영어의 발음 습득 과정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 않는다. 외국어를 배우는 학습자들은 처음에는 모국어에 영향을 받긴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학습 대상 언어의 구조 안에서 발견되는 규칙을 토대로 학습한다. 우리는 글을 읽을 때 철자법과 말소리(음소와 음성) 사이에서 작용하는 규칙성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그 규칙에 따라 습득한다. 우리말의 규칙을 들자면, ‘아버지’와 ‘바지’ 두 글자에 있는 [ㅂ]은 표기상으로는 동일하지만, 실제로 음성적으로 서로 다른 음가를 지닌다. 곧 [ㅂ]은 ‘아버지’처럼 모음(‘ㅏ’와 ‘ㅓ’) 사이에서는 성대가 떨리는 유성음으로 발음되지만, ‘바지’처럼 초성에서는 무성음이다. 영어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orange’와 ‘danger’에서 볼 수 있듯이 [a]의 발음은 강세를 받을 때와 받지 않을 때 달라지는데, 이런 현상은 여러 언어의 음운구조에서 발견되는 규칙성이다. 이와 같이 발음 습득은 글자와 소리구조 사이에 존재하는 일관된 규칙성에 따라 결정된다. 영어 단어를 한국어로 어떻게 표기해야 할지의 문제 제기는 언어습득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빚어진 해프닝이다. 영어교육을 위한 정책가와 교육자들은 개념을 상징하는 시각적 기호에 불과한 문자와 언어학습자의 무의식적인 언어 지식을 표상하는 언어규칙을 차별화할 수 있을 정도의 지식은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한다. 또한, ‘언어’는 소리, 단어, 문장 등을 구성하는 문법규칙일 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생각’을 전달하는 매개라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인간에게는 침팬지와는 달리 발화를 가능하게 하는 성대가 있지만, ‘생각’이 없으면 어떤 ‘말’도 할 수 없고, 한다고 해도 생각 없는 말은 대화로 발전되지 못 한다. 외국어뿐만 아니라 모국어 구사 능력도 마찬가지이다. 의견이 불분명하고 논지에 설득력이 약하면 모국어로도 효율적인 대화를 하기 힘들다. 한편, 적절한 실증자료로 입장과 견해가 독창적이고 논리 정연한 화자는 모국어이건 어눌한 외국어이건 ‘말’을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관심과 흥미를 자아내어 풍부한 대화를 이끌 수 있다. 이것은 영어교육을 단순히 교사의 영어연수와 학급정원의 감축으로 해결될 수 있는 과제로 단순히 간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국어, 수학, 사회, 과학 등 여타 과목이 암기식 교육에서 탈피하지 못한 채 학생들의 창의적이고 논리적인 사고 능력을 함양시키지 못한다면 아무리 영어 발음과 문장구조가 원어민의 수준이라 한들, 글로벌 경쟁 사회에서는 효율적인 대화가 불가능한 ‘벽의 꽃’(wallflower)으로 전락할 것이다. 국제적 석학들 중에는 영어 발음과 구사력이 어눌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 알폰소 카라마차(신경과학), 빌럼 레벨트(심리학), 구노 스스무(언어학), 장피에르 샹죄(신경생물학) 등은 각각 이탈리아, 네덜란드, 일본, 프랑스 출신으로서 부족한 영어 실력이지만, 이 학자들의 강연장은 시작하기 한두 시간 전부터 줄을 서도 입장하기 어렵다. 물론, 한국에도 국내 박사들 중에 <네이처>와 <사이언스> 학술지에 기고하는 훌륭한 학자들이 많이 있다. 글로벌 경쟁에서 발탁된 유엔의 반기문 사무총장도 조기 유학으로 영어를 습득하지 않았다. 한국의 영어교육은 뚜렷한 교육 목표를 정립하고, 언어규칙성에 민감한 인간의 언어능력을 존중하면서, 우리 아이들이 창의적이고 논리적인 사고를 할 수 있도록 교육 환경을 조성할 때 그늘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조숙환/서강대 영어영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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