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냐면
문화정책의 목표가 수치로 요약되고하나의 상품으로 생각되고
억압적인 삶의 매뉴얼에 사람을 가두는 한
좋은 문화는 생성될 수 없다 문화체육관광부의 업무보고에서 쏟아진 말들이 참으로 가슴을 미어지게 한다. 이 자리를 지배했던 것은 온갖 수치들이었다. ‘세계 시장에서 한국의 문화 콘텐츠가 차지하는 비중은 3%가 안 되는 2.8% 정도’, ‘세계 9위 정도 되는 것’, ‘외국인 관광객이 600만 명, 내국인의 국외 관광 숫자인 1200만 명에 도달하지 못해’ ‘부처의 생산성을 2배로’. 여기서 문화정책의 최종 목표라고 불릴 수 있는 하나의 숫자가 탄생한다. ‘2012년 5위’. 사회의 모든 영역이 갖가지 수치로 표현돼 지표화된 사회를 만들어내고 있는 마당에 또 하나의 수치가 뭐 그리 대수인가 할 것이다. 수치만큼 객관적인 비교 잣대도 없을 것이고, 목표를 명확하게 구체화하는 느낌을 주니 얼마나 편한 방식이고 합리적인가 할 것이다. 온갖 통계와 수치의 진실성을 따져 묻는 것을 조금 뒤로 하더라도, 문화정책의 목표가 이렇게 숫자 몇 개로 요약되고 제시되는 것이 얼마나 몰상식한지를 급하게 따져 물어야 할 때다. 문화 콘텐츠란 도대체 무엇일까? 또 문화 콘텐츠 기술이라는 것도 정체가 참으로 모호하다. 문화라는 것이 온통 물질화된 제품으로 시장에서 거래되는 ‘콘텐츠’로만 받아들여지는 것도 참으로 웃기는 일이다. 문화가 이렇게 이해된다면 우리는 이미 너무나 풍부한 문화 속에 살고 있다. 매일 쏟아지는 그 수많은 문화 콘텐츠들은 다 무엇이란 말인가? 문화 콘텐츠라는 말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것들을 누가 창작하는가? 다양한 사람들의 경험과 감성, 지식과 교양, 상상력과 폭넓은 배움 등 매우 복합적이고 장기적인 과정의 산물이다. 우리가 보통 ‘천재적인 창의성’이라고 말하는 것도 어느 천재 혼자의 머릿속에서 뚝딱 나오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문화 콘텐츠 이전에 우리 사회의 문화적 분위기와 풍토가 더 중요하다. 교육·교양과 지식의 축적과 변형, 자유로운 표현과 대화, 우리 내부뿐만 아니라 외부의 학문과 지식, 철학과 사상, 예술과 대중문화들을 자유롭고 성찰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환경 없이는 좋은 문화가 형성되기 어렵다. 운 좋게 잘나가는 콘텐츠 하나 만들 수는 있겠지만, 그 성공이 그리 오래 지속되지는 않는다. 게다가 우리 바깥의 사람들 또한 어느 한 나라의 문화를 평가할 때, 잠시 유행하는 콘텐츠 상품에 주목하기도 하겠지만, 그들의 눈은 다른 곳을 향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문화를 하나의 가시적인 제품이나 물질로만 생각하는 한 우리는 그 사람들이 향하는 시선의 의미를 절대 읽어낼 수 없다. 일제고사와 심야학원 공부, 대학 입시, 그리고 대학 진학 이후의 취업고시에 학생들을 가두고,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개인들을 위해 제공되고 있는 삶의 매뉴얼 속에 사람들을 가두는 한 문화는 퇴보하고, 문화 콘텐츠는 바닥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문화를 몇몇 전문적인 콘텐츠 제작자나 기업에 달렸다고 생각하면서 더 넓은 곳에 문화가 있음을 깨닫지 못한다면, 문화 콘텐츠는 계속 비슷한 유형의 모방과 재생에만 그칠 것이다. 철학과 학문, 예술을 돈벌이 수단으로 간주하면서 대학이나 다른 교육 기관이 운영되거나 정치적 목적으로 이념 따져가며 학문과 사상, 예술의 영역을 통제하거나 조정하려 든다면 곧바로 문화 콘텐츠의 샘은 마른다. 문화 그리고 문화 정책, 이제 도대체 문화가 무엇이고, 그 문화의 창조와 발전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제대로 사고할 때가 아닐까. 제발 그리고 부디 기술공학주의에 기초한 문화정책에 과감한 이별의 키스를 보내자. 그래야 바깥 사람들이 우리의 문화에 눈을 돌릴 것이다.
이영주/한국예술종합학교 예술연구소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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