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8.05.12 20:42
수정 : 2008.05.12 20:45
왜냐면
WTO 위생 및 검역협정은 과학적 증거가 불충분한 경우 수입을 제한하는 잠정 조처를 할 수 있는 회원국의 주권적 권리를 인정하고 있다. 행정협정이라도 주권의 제약에 관한 조약을 체결할 경우 국회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 검역주권 포기는 누굴위한 협정인가.
미국산 쇠고기의 수입재개 결정에 대한 국민적 저항으로 인해 한-미 관계가 자유무역협정(FTA)의 비준을 앞두고 중대한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광화문에서 시청에서 시작된 촛불시위는 인터넷을 통해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다. 정부당국은 국제기준과 과학적 근거에 입각한 정책 결정이라 주장하고 있으나 시민단체들은 국민건강에 대한 위해 가능성을 이유로 한-미 합의를 무효로 하고 재협상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세계무역기구(WTO) 위생 및 검역협정(제2.2조)에 의하면 모든 위생검역규제는 충분한 과학적 증거에 입각해야 한다. 협정상의 ‘과학적 증거요건’은 인체건강 및 환경보호를 위한 위생 및 검역규제를 과학적 원칙 및 증거에 입각하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과학적 증거요건’은 국내 산업을 보호하기 위한 위장된 보호주의적 위생 및 검역규제조처의 남용을 방지함으로써 자유무역질서를 확립하는 ‘합리적인’ 법원칙으로써 기능한다.
문제는 과학적 증거가 불충분할 경우 국민건강에 대한 위해 가능성만을 이유로 수입규제조처를 취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위생 및 검역협정(제5.7조)은 과학적 증거가 불충분한 경우 수입을 제한하는 잠정 조처를 할 수 있는 회원국의 ‘주권적 권리’를 인정하고 있다. 위해성에 관한 논란이 있는 경우에는 돌이킬 수 없는 환경재앙을 방지하기 위한 예방적 차원에서 위해성 여부에 대한 과학적 증거가 확보될 때까지 잠정적으로 수입을 제한하는 것은 주권국가의 고유한 권리이다.
따라서 “미국에서 광우병이 발생하더라도 국제수역사무국(OIE)에서 미국의 지위를 변경하지 않는 이상 수입을 계속해야 한다”고 합의한 것은 명백히 주권국가의 ‘검역주권’을 포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 헌법(제63조)은 “주권의 제약에 관한 조약”을 체결할 경우 국회의 동의를 받아야 하며, 국회의 동의를 받지 않은 경우 헌법을 위반한 것으로 해석된다. 정부당국은 한-미 쇠고기합의(미국산 쇠고기 및 쇠고기제품에 관한 수입위생조건)를 국회의 비준동의가 필요 없는 행정협정이라 하고 있는데, 일반적으로 행정협정은 국회의 비준동의가 필요 없는 조약에 해당된다. 그러나 국민주권을 제약하는 내용을 포함한 경우에는 용산기지의 이전에 관한 한-미 양해각서에서와 같이 합의문의 명칭이나 형식에 관계없이 국회의 비준을 요하는 중요한 조약에 해당된다.
인간이나 동식물의 건강 또는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수출입제한조처를 취하는 것을 허용하는 ‘관세무역 일반협정’(GATT) 제20조 또는 위생 및 검역협정을 원용하여 광우병이 미국 내에서 발생할 경우 우리나라는 미국산 쇠고기에 대해 수입금지조처를 할 수 있겠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특별법 우선의 원칙에 따라 양국간에는 양자 합의가 우선되기 때문에 한-미 합의가 우선적으로 적용된다. 따라서 미국 내에서 광우병이 발생한다 하더라도 한-미 합의를 개정하지 않고서는 가트 제20조, 또는 위생 및 검역협정을 적용할 수 없다. 그러한데도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금지할 경우 미국은 세계무역기구 협정 또는 한-미 자유무역협정상의 분쟁 해결 절차를 원용할 수 있으며, 이 경우 양자 합의가 우선 적용된다.
살코기에도 인간광우병을 유발할 수 있는 정도의 프리온이 포함될 수 있다는 과학자(미국 몬타나주 맬로플린연구소 조지 칼슨 박사)의 연구결과와 인간광우병의 발생 원인에 대한 과학자들간의 논란 등을 고려해 볼 때 위해 가능성이 있는 수입쇠고기에 대해 사전주의적 예방 조처를 적절히 하는 것은 정의의 필수 요건이며, 자국민의 건강 및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적절한 조처를 하는 것은 정부당국의 고유한 의무다. 인체 위해성에 대해 논란이 있는데도, 광우병 쇠고기에 대한 검역주권을 포기한 한-미 합의는 국민전체를 실험도구화하는 위험한 비민주적 정책이라 아니 할 수 없다.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합의인가?
최승환 경희대 법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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