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냐면
쇠고기협상은 협상 아닌 일방적 수용국민주권 대행하면서 국민의견 무시
결국 ‘민주적 정당성’마저 치명상
미국 비위 맞추기보다
국내 민주주의 바로 세워야 10대들의 장난 또는 특정 이념 추종자들의 파행 정도로 폄하되던 ‘광우병 촛불집회’에 드디어 퇴근길 직장인들은 물론 대학교수 관련단체들까지 가세하며 확산일로에 있다. 이제는 자랑스런 ‘국민승리의 역사’로 평가되고 있는 ‘4·19’나 ‘6·29’의 초기 현상과 흡사한 형국이다. 대선 승리에 이어 총선 승리까지 거머쥔 이명박 정부가 예상치 못한 ‘새로운 국민항거’가 발생하게 된 최대 요인은 어디에 있는가? ‘민주적 정당성’과 함께 민주주의를 지탱해 주는 두 바퀴 중 하나인 ‘절차적 정당성’에 대한 경시 풍조에 기인한다 할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국민의 직접선거를 통해 당선됨으로써 확고한 ‘민주적 정당성’을 확보했다. 국민의 동의와 지지를 내용으로 하는 ‘민주적 정당성’은 민주주의에서 생명선과 같은 것이나 ‘절차적 정당성’이 담보되지 않으면 한쪽 바퀴만 있는 수레와 같게 된다. 목적이나 목표가 아무리 정당하다 해도 민주주의는 그 내용과 절차에서도 정당성을 갖춰야 하기 때문이다. 이명박 대통령 일행은 한국 대통령으로서는 최초로 백악관이 아닌 캠프 데이비드 별장에서 가진 ‘역사적인 한-미 정상회담’에 감격한 나머지 ‘절차적 정당성’을 간과하는 어리석음을 범했다. 첫째, 이번 ‘한-미 쇠고기 협상’은 ‘협상’이 아니라 미국 의견의 ‘일방적 수용’이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협상’은 계약과 마찬가지로 대등한 당사자 자격을 전제로 해 서로 의견을 충분히 개진하고 양보와 수용이 뒤따라야 한다. 미국의 의견과 정책을 고스란히 담은 이번 ‘한-미 쇠고기 회담’은 시작부터 민주주의 요건을 갖추지 못했던 것이다. 둘째, 국민의 대표인 대통령이 국민의 행복 추구권과 생명권과 결부된 중요한 주권을 대행하면서 국민 의견을 도외시함으로써 절차적 정당성을 간과했다. 주권자인 국민은 자신의 생명 또는 건강과 직결되는 미국산 쇠고기, 특히 30개월 이상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과 관련해 좀더 정확한 정보접근이 필요했다. 그러나 국민들은 이러한 지식이나 정보를 정부가 아닌 일부 언론과 관련 전문가들을 통해서야 비로소 알게 됐다. 무언가 불안한 조짐에 떨고 있는 국민들은 무조건 안심해도 된다는 식의 정부 말만 듣던 중 접한 ‘새로운 정보’ 앞에서 정부 당국을 상대로 한 불신과 분노가 가중되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셋째, ‘절차적 정당성’의 간과는 곧 ‘민주적 정당성’을 취약하게 만든다는 역사적 교훈을 바로 보지 못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던 정권 초기의 지지율을 급락하게 만들었던 역대 정권의 교훈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했다. ‘실용’이니 ‘경제’니 하는 수식어와 함께 벅찬 기대를 안고 출범한 이명박 정부는 ‘강부자 내각’ 또는 ‘고소영 내각’ 등의 지탄 여론 속에서도 큰 무리 없이 지지율 순항을 하다 ‘광우병 내각’ 국면에서 지지율 급락을 피하지 못하고 있다. 동태적이면서도 미시적인 국민 여론의 촉수라 할 수 있는 ‘민주적 정당성’에 치명상을 입게 된 것이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처리는 물론 부시 대통령과의 정상회담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 나라 안의 민주주의를 바로 세우는 일이다. 차상희 따뜻한 나눔운동본부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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