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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06.19 19:01 수정 : 2008.06.19 19:01

왜냐면

민주국가들 20세기 후반 소비사회 진행
건전한 시민이 탐욕의 소비자로 변신
소비자도 생산자 횡포 대응 그쳤으나
촛불집회 통해 시민-소비자로 거듭났다

경제학자인 폴 크루그먼도 얼마 전 <뉴욕 타임스> 칼럼을 통해서 언급했듯, 1906년 소설가이자 사회주의자인 업튼 싱클레어는 <정글>이라는 소설 형식의 폭로 기사를 발표했다. 이 책은 그해 6월30일 ‘순정식약품법’(Pure Food and Drug Act)과 ‘육류검역법’(Meat Inspection Act)을 미국 의회를 통과시키는 데 기폭제가 되었다.

그런데 우리 시각에서 크루그먼이 언급하고 있지 않은 육류검역법의 입법 과정을 알 필요가 있다. 싱클레어의 기사를 보면, 품질 좋은 쇠고기는 유럽으로 수출되었고, 미국인들은 질병에 걸렸을지도 모르는 쇠고기를 먹을 수밖에 없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유럽에서는 제대로 된 검역법이 존재했으나, 미국에는 없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미국에서도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검역법을 만드는 것은 당면과제였다.

그런데 이 법안이 만들어지는 데는 소비자단체도 일조했지만, 대통령과 의회 의원들, 그리고 로비를 통해 의회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거대 ‘쇠고기 트러스트’와의 정치적 타협이 훨씬 중요한 역할을 했다. 즉, 미국의 중산층은 소비자로서 그들의 권리를 충분히 반영할 수 없었다. 만약 그랬더라면 법안 초안에 있던 모든 육류에 포장 날짜를 표시해야 한다는 내용이 최종 법안에서 생략되거나, 도축되는 가축의 질병·위생 상태를 검역하는 비용을 포장육업자들이 치른다는 내용이 연방 정부가 치러야 한다는 내용으로 바뀔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1987년 6월 항쟁은 우리 국민을 진정한 시민으로 만들어 이땅에 시민사회가 탄생하는 계기를 제공했으나, 89년 이후 전개된 옛소련의 해체와 동유럽 공산주의의 종말은 시민사회가 제대로 자리잡기도 전에 탈정치시대를 불러왔다. 그런데 90년대 탈냉전 시대와 더불어 우리가 주목해야 할 현실은 소비사회였다. 이 시기에 산업화의 종착역에 도착한 한국은 어느덧 소비사회에 도달해 있었다. 소비주의라는 부드럽고 달콤한 이념은 민주니 정의니 하는 딱딱하고 엄숙한 이념들을 녹여 버렸다. 외환위기조차도 이러한 흐름을 바꾸지는 못했다. 브랜드와 명품을 욕망하는 소비자들은 이땅에서 민주사회를 꿈꾸던 시민들을 무장해제시켰다. 이런 현상은 일찍이 소비사회에 도달한 나라에서 목격되었다. 20세기 후반 이후 많은 선진 민주주의 국가들에서도 소비사회가 진행되면서 건전한 시민은 탐욕스런 소비자로 변신했던 것이다.

지난 4월 이명박 정부가 한-미 정상회담에 맞추어 미 쇠고기 수입협상을 미국이 원하는 대로 간단하게 끝내 버리면서 새로운 상황이 전개되었다. 정부는 광우병 염려 없이 값싼 쇠고기를 실컷 먹을 수 있다고 했으나, 촛불집회를 통해 10대부터 시작된 “너나 드세요”라는 간결한 답변은 전국민의 공감대를 형성했다.

주목할 점은, 촛불집회를 통해서 시민운동과 소비자운동이 만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두 운동의 만남은 역사적 사건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민주화 이후의 시민운동은 사실상 실종되었으며, 기왕의 소비자운동은 그저 약자로서의 소비자를 생산자의 횡포로부터 보호하는데 그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부의 미국산 쇠고기 합의 이후 국민들은 적극적 시민들로 바뀌기 시작했으며, 당당히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소비자로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대다수의 국민들이 시민으로서의 소비자로 혹은 소비자로서의 시민으로, 곧 시민-소비자로 거듭나고 있는 것이다.


얼마 전 촛불집회에 대해 소설가 이문열은 먹을거리가 빌미를 제공했다고 보았지만, 21세기 소비사회에서 먹을거리는 결코 그 정도 수준이 아니다. 누구도 광우병 위협의 가능성으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기에 모든 계층·연령·집단이 하나가 되었다. 그러기에 마르크스의 주장과는 달리 만국의 노동자들은 단결하지 못했지만, 먹을거리 위협 앞에서 한국의 소비자들은 단결할 수 있었다. 새로운 역사를 만들고 있는 촛불시위의 주인공들은 시민과 소비자가 대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하나로 결합된 존재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 것만으로도 세계사에 기록될 것이다.

김덕호 한국기술교육대 교양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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