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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10.19 19:15 수정 : 2008.10.19 21:21

왜냐면

권력을 탐하는 무리들은
서로 존댓말을 쓰다가도 중간에
“그거 말되네” 반말 섞거나 “으하하하” 음험한 웃음
좌중 주도한다는 메시지 보내는 순간
좌중은 빨리 그 자리 떠나고 싶을 뿐

세상에는 당연히 받아들이는 것이 많다. 언제부터 뭐가 잘못된 것인지도 모르고 불편과 차별을 감수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계급화된 말로 인한 권력 확인이 그 하나다. 사극에 보면 왕자의 스승이 왕자에게 존댓말을 쓰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서로 존댓말을 쓴다. 서로 반말을 써도 되는 계급간 평등 관계지만 존댓말을 쓴다. 나는 이 장면을 보면 감동하곤 한다. 거기에서 인격의 교류를 볼 수 있으니까 말이다. 사실 부부끼리 존댓말을 쓰는 장면을 보면서 또는 자식들에게 존댓말을 쓰는 모습을 볼 때도 감동은 마찬가지다. 서로 인격적 대접을 하는 일이 나쁜 것인가?

교수와 학생의 언어 생활을 보면서 학생과 교수가 서로 어떻게 생각하는지 살펴보는 것도 흥미롭다. 교수는 강의 할 때는 대체로 존댓말을 쓴다. “오늘 몇과 할 차례지요?” 원래 한국말은 대중 연설시 존댓말을 쓰는 경향이 강하다. 듣는 상대의 수가 많아서 일까? 그러나 일단 연구실에서 일대일로 상담할 때는 180도 달라진다. “앉지. 요즘 공부 열심히 해? 좀 잘해라!” 이렇게 표현이 달라진다. 교수는 학점을 주는 권력이 있다. 나이도 많다. 지식도 비교가 안 된다. 무엇보다 학위가 있다. 그러니 학생 입장에서도 별로 억울할 게 없다. 오히려 자발적으로 존댓말을 써준다.

가끔 나이 어린 강사들이 강의 기회를 얻기 힘든 경우가 있다. 강단에 설 자격은 다 갖추었는데 그 놈의 나이가 어린것이다. 학생 중에 강사보다 나이가 더 많은 경우 위신이 안 선다는 논리다. 도대체 말이 되나? 강의를 나이로 하느냐 말이다. 좌우지간 교수는 아무 생각 없이 이 계급의 차이를 이용해서 학생에게 반말을 하고 아무 양심에 가책도 없다. 언어는 계급의 확인이다. 그러므로 권력자는 자신의 지위를 반말을 써가며 확인하는 것이다.

이렇게 위계 질서가 확실히 정해지면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반박하기 어렵게 돼 있다. 언어 습관 자체가 그것을 방해한다. 언어는 권력을 담고 있기 때문에 그 언어 자체가 자유로운 의사 표현의 걸림돌이 된다. “이거 복사해. 응?” 이렇게 말하면 복사하지 않으면 알지? 라는 메시지를 던지는 것이다. “이것 복사 좀 부탁해도 될까요?” “지금 바쁘니까 나중에 하면 안돼요?” 어떤가? 쌍방이 자유로운 의사 표현을 하지 않는가? 지금 우리가 민주국가에 살고 있다면서 엄연한 주종 관계가 언어를 통해 그대로 노정되고 있다. 대한민국 민주국가다.

계급도 없는 평등한 사회다. 그런가? 그러지 않으니까 언어생활이 이 모양이다. 경제적으로 약자 또는 조직사회에서 아랫사람은 반말을 들으며 자존심이 상한다. 나는 90도 각도로 사장에게 인사하는 회사 직원들을 봤다. 사장이 직원에게 깍듯이 존댓말을 쓴다면 이 직원은 비록 허리를 굽힐지언정 인격 모독을 당했다고 느끼지는 않을 것이다. 실제 그렇게 하는 회사도 있는 것으로 안다. 얼마나 멋진 사람들인가?

비록 외적인 조건은 다르지만 상대를 한 인격체로 대우해 주는 일은 그 자체가 감동이다. 그런 훈련이 실시되어야 할 학교에서 그것이 안 되는 이유가 뭘까?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나는 학생들에게 같이 반말하자고 한다. 그렇다고 내 위신이 깎이나? 아무래도 잘 안 된다. 내가 존댓말을 쓴다. 그러면 학생은 원래 존댓말을 썼고 나만 존댓말을 쓰면 되므로 훨씬 혁명이 쉽다. 혁명이 이렇게 쉽다. 교수와 학생은 서로 존댓말을 쓰자. 아니 대한민국 국민이 모두 존댓말만 쓰고 반말을 추방하자.

나는 가끔 “내가 교수가 아니라면 얼마나 불행했을까?” 등골이 오싹하다. 교수는 총장도 반발을 안 쓰고 이사장도 반말을 안 쓴다. 안 그런 학교도 있다고 들었다. 동료끼리도 존댓말을 쓴다. 서로 교수님이라고 님 자까지 붙여준다. 교수끼리는 다 평등한가 보다. 하기야 연구실에 들어가 문을 닫으면 하루 종일 얼굴을 서로 안 봐도 되는 직장이 대학이다. 자유로운 연구 분위기를 보장하려면 그렇게 해야 한다.

나는 언어의 민주화를 이야기 하는 중이다. 반말을 없애자고 제안해 놓고 지금 이 글도 경어체로 쓰지 않는 자신이 밉다. 이 글이 나의 해라체 쓰기의 마지막이길 바랄 뿐이다. 언어의 계급이 언어와 문자 생활의 발전을 저해하고 있다. 적절한 호칭이 생각 안 나서 말을 걸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혹, 섭섭해 할지 몰라. 아저씨라 해야 하나 선생님이라 불러야 하나?” 기차를 타고 서울서 부산까지 가보라. 옆에 누가 앉으면 우선 나이가 궁금하다. 말을 붙이려는데 계급을 확인해야 할 것 아닌가? 낯선 사람이므로 나이가 계급의 척도가 된다. 나이를 물어보는 게 어렵다면 차라리 대화를 않는 게 더 편하다. 그래서 싸가지고 간 김밥을 혼자 먹으며 부산역에서 내린다.

계급은 이처럼 소통을 막는 역할을 한다. 영어라면 ‘you’ 라고 하면 그만인 것을 형씨? 댁? 선생님? 아저씨? 저 여기요? 학생? 이렇게 골치가 아프니 그냥 말을 안 건네는 게 낫다. 나는 이 말 때문에 셋이 모이면 불편하다. 나는 학생에게 존댓말을 쓰는데 동료 교수는 나와 같이 있는 학생에게 반말이다. 물론 학생을 비하해서 반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셋 사이에 언어가 통일되지 못하므로 매우 부자연스러운 장면이 연출된다. 내가 민망하다. 나는 사회 부적응자다. 이상주의자다. 나는 소수에 속하는 사람이다. 내 생각이 틀릴 수도 있다. 그러나 옳고 그름을 단지 숫자 놀음의 희생양으로 만들어야 쓰겠는가?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나는 학생들을 제자라고 부르기도 미안하다. 스승과 제자라는 단어에서는 제자가 스승을 찾아 배움을 구하는 자발적 상하 관계가 연상되기 때문이다. 내가 학생이 있는 대학을 찾아가 학생을 만난 건가? 학생이 내가 있는 대학을 찾아와 나를 만난 건가? 나는 학생들이 차라리 내 친구이길 바란다. 어려움을 기탄없이 이야기 하고 같이 고민해주는 친구 말이다. 그러려면 친구끼리는 말의 계급이 같아야 한다.

친구니까 커리큘럼도 같이 짜야 한다. 그런데 그런 대학은 없을 것이다. 등록금을 낸 학생이 원하는 커리큘럼을 짜는 것이 불가능할까? 지금은 불가능하다.학생과 교수가 친구로서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한다면 가능하리라고 본다. 언어를 민주화해서 대학을 민주화하자!

권력을 탐하는 무리들은 조직에서 자신이 대접받고 싶어하고 영향력 있는 행세를 하려고 하며 사람들이 자기를 인정해 주길 바란다. 이런 무리들은 서로 존댓말을 쓰다가도 가끔씩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고 싶으면 “아, 그런가 봐. 그거 말되네” 등의 반말을 섞기도 하고 “으하하하” 하면서 호탕하게 아니 음험하게 웃기도 한다. “이렇게 좌중을 주도하며 웃을 수 있는 군번은 나밖에 없다고” 라는 메시지를 보낸다. 뻔히 알면서 이런 심리전에 신경을 써야 하는 좌중은 “이건 군대가 아닌데” 라는 말을 속으로 되풀이하면서 빨리 그 자리에서 떠나고 싶을 뿐이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면서도 은연 중에 반말이 나오는 경우도 있다. 존댓말을 계속 쓰다가도 대답하는 말 가운데 “그거 없는데. 어떡하지?” 이런 투로 반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두 부류다. 한 부류는 전혀 반말할 생각도 없고 단지 혼잣말로 자신에게 하는 말이다. 그러나 대화 중이므로 싫든 좋든 오해의 소지가 있다. 또 한 부류는 혼잣말하는 척하면서 “나는 언제라도 반말이 나갈 수 있으므로 조심하라. 만만히 보지 마라” 라는 메시지를 던지는 무리다. 역시 계급을 의식한 언어 표현이다. 옆에서 제3자로 들어도 피곤하다. “그거 없는데요. 어떡하지요?” 라고 하면 자신이 아랫사람임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꼴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말한다.

언어 생활이 이처럼 피곤해서야 쓰겠는가? 그러지 않아도 스트레스가 많은 한국 사회다.

언어생활이라는 문화생활을 하면서 좀 고상하게 할 수 없나?

“언어생활이라는 문화생활을 하면서 좀 고상하게 하면 안되겠습니까?”

나와 이야기 하는 학생들은 편하다고 한다. 친구처럼 대하니까 권위를(언제 권위가 있었나?) 없애기 때문에 편하다고 느낀다. 나도 편하다. 학생들이 의견을 스스럼없이 개진하고 솔직한 속내를 드러낸다. 계급으로 이야기하지 않고 진심으로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국민들이여! 말의 계급을 청산합시다! 반말을 추방합시다!

허준 선문대 영어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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