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냐면
힘없는 나라의 백성으로 태어난 죄로개인들이 겪은 지옥 같은 삶을 부끄러워해야 합니까
올바른 미래 위해 역사에서 배우게 해야 합니다
서대문독립공원 여성인권 박물관 건립해
과거를 증거할 수 있도록 힘을 보태주십시오 저의 할머니 유덕순의 아버지 유장열씨는 독립군이셨습니다. 국내에서 모은 독립군 군자금을 만주로 이송하는 책임을 맡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저의 고향(익산군 북일면)에서 독립군과 일본순사들 사이에 교전이 있었습니다. 그 교전에서 독립군들이 부상을 입었고, 제 증조부께서는 독립군 부상자 중 한 명을 집으로 데려와 두 달 동안 치료를 해서 돌려보낸 일이 있었습니다. 얼마 후 독립군 책임자인 유장열씨가 감사 인사차 증조부 집을 방문했고, 그 첫 만남에서 두 분은 의기투합하셨습니다. 두 분의 의기투합은 곧바로 유장열씨의 고명딸과 증조부 둘째아들의 결혼으로 이어졌습니다. 이런 연유로 저도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저의 외증조부인 유장열씨는 체포당해 감옥살이를 하셨고, 광복 후에는 갈 곳이 없어 딸에게 의탁하시다 결국은 돌아가셨습니다. 제가 국민학생 때였으니 거의 50년 전 일입니다. 그래서 ‘독립군’이라는 말만 들어도 제 가슴은 뜁니다. 저는 2007년 3월과 2008년 9월, 두 차례 걸쳐서 오키나와의 미야코지마섬과 도카시키섬, 이라부섬을 답사했습니다. 오키나와에서 비행기로 40분, 다시 배로 20분 걸리는 남태평양의 점과도 같은 작은 섬들에까지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강제로 끌려와 고초를 겪은 흔적들이 여기저기 남아 있었습니다. 그 섬들에는 징용으로 끌려갔던 우리의 젊은 청년들 손으로, 순전히 사람의 힘만으로 파 놓았다는 높이 2미터, 폭 5~6미터, 길이 30미터의 크고 작은 방공호들이 있었습니다. 사탕수수밭을 헤치고 나아가니 꽃다운 나이에 ‘위안부’로 끌려갔던 우리의 할머니들이 사용했던 우물들이 여러 곳에 있었습니다. 조선에서 끌려온 여성들이 많이 불렀다면서 섬 지역 노인들은 ‘아리랑’ 노래를 모두 외워서 부르기도 했습니다. 오키나와 주민들이 부르는 노래를 들으면서 이 먼 곳까지 와서 얼마나 외롭고 두렵고 무서워했을까 생각하니 마음이 저렸습니다. 나라 잃은 식민지 젊은이들의 강제희생이 분하고 억울했습니다. 이렇게 지키고 보호해 줄 나라가 없는 탓에 힘없는 개인들이 겪은 지옥 속의 삶을 우리가 부끄러워해서는 안 되겠지요. 아우슈비츠에서 발가벗겨져 가스실에서 살해된 조상들을 유대민족이 부끄러워합니까? 그들은 그 참혹한 역사를 후세대들을 교육시키고자 박물관으로 보존합니다. 과거 역사를 올바로 배워야 올바른 미래를 만들어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도 그 하나입니다. 서대문독립공원 주차장 옆 모퉁이에 간신히 자리잡고 설 우리 할머니들의 눈물과 희망의 역사, 대지 100평도 안 되는 작은 땅에서라도 평화와 인권을 싹틔워보겠다고 몸부림치고 있는 모습이 참으로 안타까워 보입니다. 그런데 광복회와 독립운동 유관단체에서 이마저 거부한다는 소식은 얼마나 안타까운지요. 오키나와에서 저는 한 개인이 자신이 소유한 건물에 ‘전쟁박물관’이라는 명패를 붙이고 수많은 전쟁 유품들을 보관하고 평화를 실천해 가고 있는 분도 만났습니다. 우리는 언제쯤 과거의 상처와 잘못을 교훈으로 삼는 날이 올까요? 독일과 일본 오키나와에서처럼 개인이나 단체, 또는 국가에서 과거를 증거할 수 있는 박물관을 만드는 일에 우리도 적극 나서야 한다고 봅니다. 광복회와 독립운동 유관단체에서도 서대문독립공원에 ‘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이 건립될 수 있도록 뜻을 함께해 주시고 힘을 보태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황점순 한국-베트남 시민연대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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