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8.11.12 21:02
수정 : 2008.11.12 21:02
왜냐면
‘서열화’ 환원주의는 손놓고 있잔 말
김희석씨의 반론에 대한 재반론
수학이 수능 필수과목인데 학교에서는 전혀 가르치지 않는다고 해보자. ‘그게 말이나 될 소리냐?’고 할지 모르지만, 이와 똑같은 상황을 수십년간 감내해온 집단이 있다. 그게 바로 일반고에서 예체능계 전공을 지망하는 학생들이다. 대학에 들어가려면 실기시험을 치러야 하는데, 학교에서 전혀 대비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사교육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첫째는 더 높은 서열의 상급학교에 진학하기 위한 사교육(‘선발 경쟁’으로 인한 사교육)이고, 둘째는 학교에서 기본적인 교육욕구가 충족되지 않는 데서 기인한 사교육(‘학교 불만족’으로 인한 사교육)이다. 첫째에 대해서는 많은 지적과 논의가 이뤄져왔고, 이것이 사교육을 번창하게 만든 가장 중요한 요인임은 맞다. 하지만 둘째로 인한 사교육 수요도 의외로 상당하다. 오랫동안 학생·학부모를 상대로 상담해 오면서, 안타깝게도 무조건 “학원을 알아보세요”라고 말하게 될 때가 있다. 예체능 전공을 지망하는 경우, 부적격 교사(교수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가 일부 과목을 담당하는 경우, 그리고 특목고를 지망하는 경우(외고보다 과학고가 심하다)이다. 특목고 지망의 경우를 제외하면 이것들은 전형적인 둘째 유형, 즉 ‘학교 불만족’으로 인한 사교육에 해당한다.
김희석씨가 몸담고 있는 서울예고의 경우 학생들의 학벌 지향성이 비교적 강하기 때문에, 학교에서 제아무리 잘 가르치려고 해 봐도 학생·학부모들이 추가의 사교육 자원을 동원해서 무한경쟁을 벌일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조금만 다른 곳을 바라보면, 학교에서 학원보다 편하고 저렴하게 예체능 교육을 받을 수 있으면 그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하게 생각하는 많은 학생들이 있다.(제발 이런 학생들을 만나보기 바란다.) 우리나라의 모든 학생과 학부모들이 서울예고의 경우만큼 학벌 지향성이 강한 것은 결코 아니다.
게다가 <한겨레> 10일치에 실린 김희석씨의 ‘학교를 예체능 입시학원으로 만들려는가’란 글은 ‘예체능계 전공 지망자를 위한 예체능교육’과 ‘일반 학생들을 위한 예체능교육’을 구분하지 않아 논의의 혼란을 초래하고 있다. 나는 지금 예컨대 보통 학생들의 미술적 체험과 향유 능력을 신장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보편적 미술교육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아니다. 바로 미술을 대학 전공으로 삼고 싶어 하는 학생들을 위한 중단기적 대책을 제안하는 것이다. 대입 실기시험을 없앨 수 없다면 일반 고교에서 실기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만들자는 방안이, 왜 ‘학교를 입시학원으로 만들려는’ 불순한 시도라고 매도되어야 하는가? 학원계에서는 오히려 김희석씨와 같은 수수방관을 더욱 환영한다는 사실을 모르는가?
내가 제안한 방안이 실현되려면 넘어야 할 산이 많다. 학교에 좀더 진취적인 리더십이 자리잡아야 하고(교장 임용제도의 개혁이 이를 앞당길 수 있을 것이다), 일반 고교에 교육과정 편성에서 폭넓은 자율권을 부여해야 한다. 고교선택제가 일부의 우려처럼 성적순 선발(고교입시 부활)로 오도되지 않고 순수한 선지원 추첨배정을 유지해야 함은 물론이다. 하지만 이것이 예체능계 고등학교를 대량으로 신설하는 것보다 훨씬 저렴한 사회적 비용으로 달성할 수 있음은 명백하다.
많은 사람들이 교육문제를 학벌·서열화 문제로 환원시킨다. 학벌·서열화 문제가 우리 교육을 망치는 주범인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학 평준화라도 되기 전에는 아무것도 하지 말고 손 놓고 있자는 것은 결코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 ‘선발 경쟁’으로 인한 사교육을 줄이는 것을 지향하되 중단기적으로 ‘학교 불만족’으로 인한 사교육을 줄이려는 시도를 병행해야 한다는 나의 입장을 개량주의로 낙인찍는다면, 나는 기꺼이 개량주의자가 되겠다.
이범/교육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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