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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11.16 19:27 수정 : 2008.11.16 19:27

왜냐면

“가정폭력으로 결별 뒤 친권 포기했다”
“생모 사망 땐 생부에게 친권 자동 귀속”
왈가왈부하지만 가장 중요한건 아이 판단
이제 사회는 침묵할 때다

요즈음 한 여배우의 죽음과 함께 남겨진 아이들에 대한 친권을 누가 갖느냐 하는 문제가 사회적 이슈가 되어 있다. 착한 여배우와 나쁜 전남편으로 대비되는 이러한 두 가지 양태는 친권 문제를 불러일으키는 요소가 되고 있다. 대한민국 법률상 친권은 기본적으로 살아 있는 배우자에게 귀속된다. 그런데 여기에서 논란이 되는 것은 남아 있는 배우자가 친권을 가질 자격이 있는지의 여부다. 사회 각계 인사들이 남아 있는 아이들의 아버지 친권에 비판적이다. 그들은 ‘가정 내 폭력’ 문제를 들어서 아이들 아버지의 친권 문제를 거론하고 있다.

아이들의 아버지가 이미 가정폭력의 혐의가 있고, 또한 아이들의 어머니와 결별한 뒤 한 번도 아이들을 찾아보지 않았다는 것이 그들이 주장하는 친권 반대 이유다. 여기에 대해서 성균관은 친권은 천륜이라는 것이다. 아이들의 아버지이므로 아이들에 관한 친권 행사는 아버지의 당연한 권리로서 이것은 하늘이 부여한 것이며 친권자로서 마땅히 아이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법조계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친권에 대한 견해는 여배우의 친권이 사라진 시점에서 이미 아이들의 아버지에게 친권이 자동적으로 귀속된다는 것이다. 사실상 법률에서 친권의 포기와 거부는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견해들은 모두 사실 착한 아내와 나쁜 남편에 관한 애정과 비판의 관점일 뿐이다. 여기에서 실제로 중요한 미성년 아이들에 관한 관심은 탈각되어 있다. 실제로 중요한 것은 친권의 문제가 아닌 아이들의 미래인 것이다. 아이들은 어머니와 관계된 자신의 아픔과 슬픈 상처를 극복하고 건전하고 올바른 사회인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주변인들이 돌봐주어야 할 책임이 있다. 그런데 아이들의 문제들은 등한시한 채 선과 악으로 사태를 나누고, 그에 따라 징벌로서 ‘친권 부당’의 논리를 펴는 것은 무리가 있는 관점이다. 여기서 우리는 책임 있는 지식인으로서 아이들의 미래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고민을 할 때는 아이들의 선택을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한다.

이런 문제에 접근할 때 가장 기본은 아이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아이들의 판단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 가장 먼저 고려되어야 한다. 아이들이 스스로 아버지의 보호를 필요로 하는지가 중요하다. 아이들이 어머니한테 부여받은 재산에 대한 권리 등은 물론 아이들 자신에게 귀속되어야 할 것이다. 이제 사회가 침묵할 때다. 그리고 조용히 이 아이들이 선택한 방향이 무엇인지 살펴볼 때다. 남겨진 아이들이 아픔을 극복하고 건전한 사회인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우리 모두가 마음으로 축복할 때다.

죽은 여배우는 네트워크상의 비판 때문에 괴로워했다. 신문 보도를 보면 여배우는 결국 악플에 시달리다 그것 때문에 자살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후 우리 국민과 다수의 누리꾼들이 취해야 할 가장 중요한 선택은 우리가 남겨진 아이들과 관계된 일련의 토론에서 멀어지자는 것이다. 누리꾼의 집요한 관심이 한 배우를 사라지게 했고 여배우가 사라진 곳에는 이제 생존한 아이들과 관련된 일들에 시선이 쏠리고 있다. 한 개인의 사적 영역에 지대한 관심을 갖는 것 자체가 일종의 폭력이 될 수도 있다.

이제 우리들이 조용히 침묵할 때다. 우리의 손가락이 쉴 새 없이 자판을 누르고 싶은 욕망이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잠잠해져야 한다. 이미 한 여배우를 희생으로 몰아가지 않았는가? 아이들 아버지의 친권이 있다 없다, 정당하다 부당하다 따위의 문제는 이제 당사자들에게 맡기기로 하자. 누리꾼들이여, 이제 여기에서 손을 떼자. 그리고 이제는 한 가정의 비극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말자. 오히려 우리를 즐겁게 하고 바람직한 가정에 대해서 이야기하자. 한국 사회에서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가장 아름답게 구현된 모범은 무엇인가? 그것을 온라인상에서 마음껏 토론하도록 하자. 물론 이러한 것 역시 개인의 사적 영역을 보호하는 차원에서 ‘익명성’을 지키는 범위 안에서 토론을 말하는 것이다.

김승만 전남대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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