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냐면
손철주 칼럼 ‘옛 사람들의 책읽기 풍경’을 읽고 부귀해진 다음 공을 갚겠다고 다짐한 조강지처에게자기를 떠나갔다는 이유로 복수할 것 같진 않다
가부장제 희생봉사 장려 위한 후대의 덧칠이 아닐까 <한겨레> 11월8일치에 실린 학고재 주간 손철주씨의 글을 읽고, 해박하고 여유로운 심미안에 감명을 받았다. 옛 그림에 나타난 글읽기 풍경이 주제인데, 그 가운데 곁들인 주매신의 역사고사가 고교 때 박학다식하신 한문 선생님한테 들은 강태공 고사와 아주 닮아, 이참에 한서와 사기의 원문을 찾아보았다. 궁80, 달80을 살았다는 강태공이 젊어서 글공부만 할 때, 아내가 강피를 훑어다 먹고사는데, 하루는 훑은 강피를 마당에 널고 또 훑으러 간 사이 갑자기 소나기가 내렸다. 방 안에서 책을 보던 강태공은 삼매에 빠졌는지, 그 귀한 식량이 빗물에 떠내려가는지도 아랑곳 않고 글만 읽었다. 비를 쫄딱 맞고 돌아온 아내가 그 꼴을 보고 하도 기가 막혀, 남편을 원망하며 집을 떠나갔는데, 강태공이 말리는 얘기부터는 주매신 얘기와 아주 비슷한 것이다. 근데, 사기의 제(齊)세기(世紀) 강태공 기록에는 이런 사실은 전혀 안 나오고, 한서의 열전에는 나오지만 뒷부분이 사뭇 다르다. 주매신은 오나라 사람인데, 집이 가난한데도 글읽기를 좋아해 생업에 종사하지 않고, 땔나무를 해다 팔아 먹고사는 지경인데도, 땔감을 지고 걸으면서도 글을 읊조리고 노래했다. 아내도 함께 나무를 이고 따라다녔는데, 남편한테 길거리에서 읊조리지 말라고 해도, 매신이 더욱 큰 소리로 노래 부르자 창피하여 떠나겠다고 나섰다. 이에 매신이 웃으며 말했다. “내 나이 50이면 부귀할 텐데, 이제 마흔이 넘었소. 당신이 오랫동안 고생했는데, 내 부귀해진 다음 당신 공을 갚겠소.” 그러자 아내는 벌컥 화를 내며 소리쳤다. “당신 같은 사람은 끝내 도랑에 빠져 굶어 죽을 판인데, 무슨 놈의 부귀요?” 매신은 붙잡을 수가 없어서, 떠나도록 놔두었다. 몇 년 뒤 매신은 조세 납부하는 관리의 졸개가 되어 장안에 올라갔다가, 황제의 총애를 받던 엄조의 추천으로 황제 앞에서 춘추와 초사를 읊어, 황제의 기쁨을 사고 벼슬을 받았다. 나중에 회계 태수가 되어 장안서 내려온 마차를 타고 당당히 부임하는데, 환영 나온 관리와 길을 닦는 백성들 가운데서 옛 아내와 그 남편을 보고, 마차를 멈춰 그 부부를 뒤 수레에 태워 태수의 관사에 데려와 후원에 머물게 하고 음식을 주었다. 한 달쯤 지나 아내가 스스로 목숨을 끊자, 매신은 그 새 남편한테 돈을 주어 장례를 치르게 했다. 그리고 옛 지인들을 모두 불러 만나고 함께 음식을 먹고, 일찍이 자기한테 은혜를 베푼 사람한테는 모두 보답했다. 이상이 주매신과 아내에 관한 한서의 기록인데, 회개한 아내가 용서를 빌고 매신이 면박한 내용은 없다. 아내는 이미 새로 시집갔다. 매신이 그 부부를 수레에 태워 관사 후원에 머물게 한 게, 아내의 배신에 본때를 보이는 앙갚음이라고 보아야 할까? 감금치사죄로? 그러기는 어렵다. 옛 친지와 은인들한테 빠짐없이 인사를 차린 성품으로, 평소에 부귀해진 다음 공을 갚겠다고 다짐한 조강지처한테, 자기를 떠나갔다는 이유로 복수할 것 같지는 않다. 매신이 고도의 정치적 심리전술로 아내를 죽음에 몰아넣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오히려 매신이 길거리에서 글 읊조리는 것조차 부끄러워 떠날 정도로 수줍음 많은 아내의 정서를 섬세하게 배려하지 못한 매신의 투박한 인정이 자살의 화근이라고 해야 옳지 않을까? 내가 보기엔, 강태공이든 주매신이든 이야기가 후대로 내려오면서 호사꾼들의 입에 부풀려지고 꾸며지지 않았을까 여겨진다. 더구나 가부장제 전통사회에서 글공부하는 선비들이 아내의 일편단심 희생봉사를 장려하기 위한 일종의 세뇌교육의 목적에서 말이다! 말 나온 김에, 크게 잘못된 세태 하나 꼬집고자 한다. 요즘 세간에 ‘팩션’(faction)이란 이름으로 역사소설이 널리 인기를 얻고, 특히 조선시대 두 화가 이야기가 떠들썩하고 논란도 제법 이는 모양이다. 역사기록이 빈 부분을 작가가 문학적 상상력을 펼쳐 있었을 법한 이야기로 메워 넣는 정도라면 괜찮고, 또 명실상부하게 ‘팩션’이란 역사소설로서 훌륭한 자리매김을 할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아무리 ‘문학’의 이름을 빌린다 해도, 사실(史實)과 딴판으로 바꾸는 짓은 역사와 위인에 대해 참으로 무책임한 죄악이라고 본다. 굳이 문학을 내세우려면, 인물의 이름도 바꾸어 사실과 혼동하지 않게 해야 한다. 그게 작가의 최소한의 양식이자 윤리다. 단지 흥미를 북돋고 잘 팔려, 이름나고 돈 많이 벌려는 얄팍한 생각은, 역사인물에 대한 무고며, 우리 역사와 겨레를 속이는 왜곡이고 모독이다. 마치 예술 표현의 자유를 내세워 지나친 외설로 잇속을 챙기는 짓처럼! 김지수 전남대 법대 부교수·동양법철학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