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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0.10.12 18:00 수정 : 2010.10.12 18:00

행복전도사라던 모 인사가 자살했다. 그것도 남편과 동반자살이다. 유서에서 “행복하게 열심히 살았는데… 너무나 고통스런 병으로 인해 떠나게 된다고” 이해를 구하고 사죄했다. 남편과의 동반자살에 대해서는 “건강하고 진실하며 성실한 최고의 남편”이 자기 때문에 같이 죽게 되어 “미안하고 고맙다”고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소박하고 순수한 말에 감동했다. 그의 “행복 메시지”에서 소시민적 삶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음을 확신했기에 자살 소식을 접한 사람들의 충격은 더욱 크다.

자살을 할 수밖에 없었던 절박한 호소를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다. 유서 하나하나에 딴죽 걸고 싶은 생각은 더욱 없다. 그러나 죽음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선생으로서 그가 결국은 행복바이러스가 아니라 자살바이러스를 옮기게 될 수 있음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행복하게 살다 700가지 통증”이란 극심한 불행이 찾아오자 결국 자살했다. 그의 남편은 “최고, 최상의 남편”인데 사랑하는 아내를 혼자 보낼 수 없어 “동반여행”을 결심했고 그는 결국 이를 받아들이며 미안하며 고맙다고 했다. 그의 말대로라면 삶을 살다가 극복하기 어려운 불행이나 고통이 오면 죽어야 하고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서는 동반자살도 할 수 있는 남편이어야 최고 남편이 된다는 말인가. 그는 자신에게 찾아온 고통과 불행을 행복하게 맞고, 자신의 전 삶을 행복전도사로 결산할 용기가 있었다면, 아니 많은 이들이 행복전도사란 애칭을 주었고 자신이 가지는 대중적 영향력에 스스로 일말의 책임감을 느꼈다면 몹쓸 병마와 끝까지 싸우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했을 것이다. 설령 너무나 고통스러워 스스로 삶의 끈을 놓더라도 남편만은 자기 삶까지 행복하게 살도록 설득했어야 했다.

하지만 남편과 함께 동반여행을 떠났다. 마치 너무나 골치 아프고 혼란스런 일들이 있어 잠시 외유를 다녀오겠노라고 말하는 사람처럼 유서를 써놓고 여행을 떠난 것이다. 죽음을 “여행”이라 표현한 것도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한다. 죽음은 여행이 아니다. 죽음을 여행으로 비유하는 허언법(euphemism)은 종종 자살을 미화하고 수단화한다. 죽음은 삶의 방편이 아니며 삶의 의지와 무관하게 삶 스스로에 자연스럽게 주어진 목적 그 자체이다. 한 개인의 삶이 종국적으로 평가되는 장이며 결코 되돌아올 수 없는 길이다.

종종 연예인들의 자살이 문제시되지만, 이번 그의 자살이 주는 충격과 파급력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리 예쁘지 않은 얼굴, 담백하고 구수한 어투로 일상의 평범한 삶을 이야기하는 그는 연예인이라기보다는 편안하게 삶의 고통과 애환을 함께 나누어 가질 수 있는 이웃집 아주머니였다. 그의 삶은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국민 대다수에게 영향을 미치는 삶이었다.

그가 남긴 자살바이러스가 악성인 것은 보균자의 주변, 사랑하는 사람에게 전염된다는 점이다. 백번 천번 양보해 그녀의 자살을 이해한다손 치더라도 남편의 자살은 자살바이러스라는 신종 바이러스가 아닌 이상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아니 이해하면 아니 되는 것이다. 그들의 동반자살은 우리 삶을 엮어내는 사회체계의 솔기들을 풀어 전체 사회보호망을 무력화할 수 있는, 그래서 시급히 대안을 찾아 막아내야 할 치명적인 바이러스일 뿐이다.

강동구 동국대 불교대학원 상사의례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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