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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면] 청소아주머니들의 뻔뻔함? |
박홍근 서울 구로구 구로1동
남자라면 화장실에서 소변을 보고 있을 때 청소아주머니가 불쑥 들어와 대걸레질을 한 경험이 누구나 있을 것이다. 아주머니들은 마치 우리가 보이지 않는 듯 쓱쓱 걸레질을 했고, 이 때문에 우리는 청소아주머니를 ‘뻔뻔함’의 대명사로 말해왔다. 억척스러운 청소아주머니들 앞에서 민망해하는 것은 남자들이라는 것이다.
우리에겐 해프닝일지 몰라도 청소아주머니들에게는 생계를 위한 일이다. 민망함을 무릅쓰고 남자화장실에 ‘들어와야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주머니들은 화장실에 들어올 때 그 민망함을 감추기 위해 우리와 눈을 마주치지 않고 고개를 숙인 채 묵묵히 일을 했다.
농성장인 문헌관에 담요 몇 장을 전하고 오면서 그제야 처음으로 아주머니들의 얼굴을 봤다. 물론 내가 학교를 다닐 때 계셨던 분들은 아니지만, 똑같은 일을 하고 똑같이 저임금과 부당대우를 묵묵히 견디면서 ‘뻔뻔하게’ 남자화장실을 드나들던 분들이다. 피로에 지친 얼굴에 깊이 팬 주름이 눈에 들어왔을 때, 주름 하나하나에서 고단한 삶을 읽어내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이것이 뻔뻔함의 실체인 것이다.
웃지 말아야 한다. 삶을 위해 일하는 이들을 보고. 최저임금에 턱없이 모자라는 임금을 받으면서도, 마땅히 쉴 곳이 없어 용변기에 걸터앉아 다리를 토닥이고, 자판기 커피 한잔 뽑아서 먼지 풀풀 나는 계단 한구석에 앉아 있는 아주머니들을 뻔뻔하다고 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그들을 보고 왜 이리 억척스럽게 사느냐고 묻지 말고, 왜 그들이 일하는 환경이 억척스러워야만 하는지 의문을 가져야 한다.
실질적으로 일주일에 50시간 이상 근무하면서도 75만원의 임금을 받고, 하루 밥값 300원이라는 비상식적인 대우를 감내한 이유는, 그것이 잘못됐다는 것을 몰라서가 아니라 아주머니들이야말로 실직과 빈곤의 고통이 무엇인지를 그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화장실에 들어오는 청소아주머니를 없는 사람 취급한 것처럼, 어떤 사람들은 당연한 권리를 찾으려는 청소아주머니들을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취급한다. 그것은 불편함을 감추기 위한 행동이다. 불편함이라는 것은 그 자체의 정당성을 인정할 때만 가능한 감정이다. 그들이 청소아주머니들을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으로 취급하면 할수록 청소아주머니들의 행동은 정당하다. 사상 최악의 추위 속에 오늘도 문헌관 찬 바닥에서 침낭만으로 밤을 지내야 하는 아주머니들의 정당함을 지지한다. 우리의 눈에는 아주머니들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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