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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면] 내가 그녀를 잊지 못하는 이유 |
박영석 한양대 행정학과 4학년
해가 바뀌기 전의 지난 3월. 지금도 전국의 수많은 고등학생들이 진학을 꿈꾸고 있을 그곳을 과감히 뛰쳐나온 여학생이 있었다. 그것도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며 당차게 말이다. 뜬금없이 한방 먹은 글로벌 유니버시티들은 꽤나 어리둥절했을 것이다. 그래, 사실 터놓고 말하자면 그가 그만두고 거부하였던 것은 고작 ‘대학’은 아니다. ‘아니’와 ‘거부한다’ 사이에 생략된 단어는 바로 ‘시스템’이다. 빨간약을 선택한 네오처럼, 그는 그들의 매트릭스에서 탈출한 것이다.
나와 내 친구들의 문제였기에 ‘김예슬 선언’은 나에게 그 어떠한 선언문보다도 감동적이었다. 또한 그러한 김예슬양이 자랑스러운 만큼 같은 행동을 하지 못하는 나 자신이 한없이 부끄럽기도 했다. 그래서 약속했다. 비록 요새는 여전히 굳건히 존재하겠지만 난 그의 편에 서겠노라고. 그의 외마디 비명을 잊지 않겠노라고. 그리고 매우 느리겠지만 조금씩 바뀌어 갈 것이라는 믿음을 갖겠다고.
그렇게 1년 가까운 시간이 지났다. 역시나 변한 것은 없다. 그런데 그는 벌써 잊혀졌다. 이미 그가 남긴 쓸쓸한 빈자리는 초일류를 꿈꾸는 누군가에 의해 채워졌을 것이다. 나 역시 처음부터 당신을 몰랐다는 듯 냉정히 돌아서 혼기 꽉 찬 여염집의 규수가 되었다. 김광규 시인의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를 음미하며 인생이란 원래 그런 것 아니겠냐는 제법 예비 기성세대다운 의젓함도 보인다. 명절이 되면 호탕하게 웃으며 조카의 작은 손에 용돈을 쥐여주는, 그런 바람직한 모습을 다시 꿈꾼다.
그래서인지 어느새 ‘김예슬 선언’은 서랍 속 맨 밑에 구겨 넣어져 있다. 그의 당돌함은 여전하건만 종이의 온기는 사라지고 활자는 힘을 잃었다. 그를 이렇게 외면함으로써 나를 조금이라도 앞당기려 한다. 그래서 나도 김예슬을 잊었고, 내 친구들도 모두 그를 잊었다고 한다. 그렇게 모두가 그를 애써 잊고 다시 행렬을 맞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두렵다. 세월이 흘러 나 자신 또한 안락한 의자와 무거운 명패에 의지하며 제이, 제삼의 김예슬을 비웃게 될까봐. 쉽게 변하지 않는 세상을 다행이라 여기며 요즘 젊은이들은 그저 뭘 모르는 것들이라 비웃게 될까봐. 부드러운 먹이와 편안한 잠자리에 길들여진 한 마리의 순한 목양견이 되어 있을까봐. 내가 김예슬을 아직 완전히 잊지 못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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