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왜냐면] ‘국민’과 ‘서민’의 덫 |
김태경 <딴지일보> 필진
한국에는 ‘국민’이라는 단어가 무성하다. 특히 정치인들의 입에서는 떨어지지 않는 단어다. 하지만 그들이 결연하고 비장한 표정으로 “국민의 뜻”을 말할 때 뭔가 당황스럽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왜인지 그들이 말하는 “국민의 뜻”은 내 뜻과는 별로 맞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분명 대한민국 국민인 나의 의견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정치인들이 ‘국민’ 다음으로 많이 쓰는 단어는 ‘서민’일 것이다. 국민이 정치적인 의미의 호명이라면 서민은 좀더 경제적인 의미를 띠고 사용된다. 국민과 마찬가지로 정치인들이 서민이라는 단어를 혀에 올릴 때는 단기필마로 적진에 뛰어드는 장수 같은 비장한 표정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그 비장함에도, 정작 ‘서민’들의 경제생활은 별로 나아지는 것 같지 않다.
그러나 ‘누구나’를 포함하는 이 두 단어는 실제적으로 ‘누구도’ 지칭하지 않는 것과 같다. 그것은 텅 비어 있는 기표이다. 예컨대 한나라당은 민주당에, 민주당은 한나라당에 국민을 따르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그렇다면 각 당의 정치적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 ‘국민’들은 어디로 증발한단 말인가? 전두환과 노회찬을, 진중권과 이한우를, 혹은 강동원과 나를 한 테두리 안에 넣어버릴 수 있는 국민이라는 말은 정당의 지지자들을 분명치 않게 만드는 호명이다.
‘서민’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다. 정치인 모두가 서민을 위한다고 하지만 실은 서민이라는 단어 속에 많은 계급을 욱여넣고 그 안에서 ‘자신의 계급’을 위하고 있다. 강만수 대통령 경제특보의 “부자들은 가슴에 대못을 박아도 된단 말이냐”는 말은 이런 현실을 폭로하는 솔직(하고 무식)한 발언인 것이다.
물론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모두 염원하는 것들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요구들에 대한 목소리는 제각기 다르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공정한 사회를 염원하지 않는 ‘국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공정한 사회’에 대한 정의와 그것을 이룩하기 위한 방법은 다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을 표출하고 합의하기 위한 곳이 국회인 것이다.
따라서 정치인들 모두가 자신이 국민을 대변하고 있다는 듯 떠들 때 대의 민주주의는 갈 길을 잃고 허우적댈 수밖에 없다. 정치인들은 ‘국민’이나 ‘서민’ 같은 텅 빈 기호가 아니라 실제적인 주체들을 대변해야 한다. 일하는 척이 아니라, 진짜 일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싸우는 척이 아니라, 진짜 싸움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정치가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정치의 영역으로 진입하지 못하고 거리에 맴돌고 있다. 예컨대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이 한진중공업 크레인 위에서 농성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명백한 정치적 사안들이 다시 차가운 거리에서 설을 맞고 있다. 언제쯤 이들은 국회의사당의 문턱을 넘을 수 있을까?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