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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1.03.15 20:13 수정 : 2011.03.15 20:13

이병원 전북 군산시 서흥남동

몇해 전 기분 좋은 일이 있던 한 녀석의 주선으로 대여섯명의 남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1차, 2차를 거쳐 3차를 논의하는 자리에서 그 기분 좋은 녀석은 남자들끼리만 노는 모양새가 맘에 들지 않았는지 대뜸 룸살롱에 가잔다. 이전 같았으면 그 선동에 놀아나지 않았을 테지만 그곳의 분위기가 새삼 궁금하기도 하였고, 또 어울리던 무리들과 헤어지는 게 아쉽다는 핑계로 함께 자리를 옮겼다.

한마음으로 단합한 사내들 사이에서 나 역시 그 설렘은 감출 수 없었는지 약간의 미소마저 띠었다. 본래 낯선 사람들과 말을 섞는 데 불편함을 느끼던 나는 가벼운 옷차림으로 남자들을 대하는 그곳의 여자들에게 줄곧 무표정으로 일관했고, 그곳을 나오는 길에 너는 돈만 날렸다는 핀잔깨나 들어야 했다. 다음날 나는 정상적인 일상으로 돌아왔고 교회에 나갔으며 점심도 잘 먹었다. 내 못난 성격만 아니라면 어제 거사를 치를 수 있었겠다는 아쉬움이 남았던 그때의 나의 몸은 가식으로 점철된 고깃덩어리, 딱 그뿐이었다. 그리고 오늘 그날을 생각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최근 장자연 사건이 다시금 불거지는 것이 참으로 다행스럽다. 발견된 편지의 조작 여부를 떠나 모든 사람들은 태어나는 순간 동등한 인격을 가지고 인권을 누릴 당위가 존재한다는 점에서 인권을 유린당한 그녀의 죽음은 사회적 타살이기에 우리 사회가 그 책임을 지는 것은 온당하다. 하지만 사회가 그 책임을 질 준비가 되었느냐는 문제는 다시 생각해볼 일이다.

장자연 사건에서의 사회적 책임을 단순히 그녀와 연루된 남자들에게만 돌리고자 하는 어젠다에 반대한다. 이 사건이 공적 영역임을 인식하면서도 몇몇 개인의 도덕적 타락을 이야기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우리 사회의 대개의 남자들에게 책임을 요구한다. 죽음의 고통이 사는 고통보다 덜하다는 무력감에서 비롯된 그녀의 슬픔을 생각하자.

그 고통을 외면한 채, 혹은 그녀와 비슷한 처지의 여성들에게 같은 고통을 주던 사람들이 너무나 쉽게 나와 별다를 게 없는 타인을 욕보이는 것은 우리가 얼마나 반성 없는 사회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허리 아래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남자들이 어디 그 리스트에 한하겠는가? 세상에는 장자연씨 말고도 남자들에 의해 죽음보다 무서운 삶을 사는 여성들이 많이 있다.

이렇게 말하는 나 역시 마초다. 남자로 이 세상에 태어난 게 다행이다 싶어 나는 마초다. 하지만 때때로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는데, 그것은 나의 마초성을 타인의 힘을 빌려 극복하고자 하는 내 비겁함 때문이다. 여성주의 운동이 이제 막 태동기에 들어선 우리나라에서 참신한 지적 경향으로 인정받기보다 ‘꼴페미’라는 단어로 익숙해졌다. 여성주의 운동의 편협함도 한몫하겠지만 남자들의 놓치기 싫은 기득권과 더욱 연관이 깊다. 옛 어른들의 권위주의와 인습을 탈피하고자 노력하는 젊은 남자들이 여성에 대한 고압적인 태도만큼은 그대로 답습하려는 태도로 거리를 활보하고자 할 때 우리 사회의 진보는 정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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