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1.03.18 20:28
수정 : 2011.03.18 20:28
사회주의의 진로에 대한
100년 전 역사 속의 논쟁을
다시 떠올리며 현실에 입각한
진보의 열린 자세를 생각한다
김대원 서울시 관악구 대학동
진보진영의 대표 논객. 진중권과 김규항이 붙었다. 논쟁은 김규항의 ‘야! 한국사회’ 칼럼으로부터 시작됐다. 그는 조국과 오연호의 <진보집권플랜>을 사실상 “개혁적인 중산층 엘리트들”의 “민주집권플랜”이지 진보집권플랜과 거리가 멀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진중권은 좌파 딱지를 붙이는 좌파 때문에 진보정당이 집권 전망도 수권능력도 없어졌다고 반박했다. 마지막으로 김규항은 “내가 문제 삼는 건 선거연합 자체가 아니라 지금 진행중인 선거연합이 과연 진보의 가치를 관철시킬 수 있는 선거연합인가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답을 내리기 힘든 논쟁이다. 김규항이 사례로 든 전주 버스노조를 보면, 이번 선거연합이 ‘연합을 빙자한 흡수통합’으로 보인다. 반면 진중권의 주장처럼 선거연합이 진보의 정권창출에 힘을 실어줄 수도 있다. 이렇게 양쪽 논리가 탄탄하기 때문에, 진보 논객들과 누리꾼(네티즌)들도 양분되고 쉽게 해답이 나지 않는 것이리라.
그러나 필자는 이에 대한 해답이 이미 나와 있다고 생각한다. 100년도 더 지난 역사이기에 단순비교는 무리일지 모르겠지만, 이 둘의 논쟁은 사회주의의 진로에 대한 역사 속의 논쟁과 너무나도 흡사하기 때문이다.
19세기 말 유럽은 혼돈의 시기였다. 기득권 세력과 우파 자유주의자(민주당), 그리고 사회주의자(진보세력)가 난립했다. 그중 사회주의자들은 정치권으로 진출하여, 우파 자유주의자들과 연합을 하느냐 안 하느냐의 기로에 섰다. 유물론과 계급투쟁을 중시하는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한다면, 정치권 진출은 엄격히 지양되어야 할 수단이었지만, 혁명은 요원했고 사회주의당은 존폐의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이 상황에서 엥겔스를 잇는 독일 사회주의당의 정신적 지주 베른슈타인은 수정주의를 주장하며 논쟁에 불을 지핀다. 그는 마르크스주의의 예언은 틀렸고, 현재 사회주의당의 노선 자체도 잘못됐다고 생각했다. 진정으로 사회주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계급투쟁 노선을 버리고, 소외된 모든 계급(중산층, 농민)을 수용해야 하며 정치적 행동에 적극적이어야 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필요하면 우파 자유세력과 연합하는 것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이에 반해 카우츠키는 계급투쟁과 유물론을 버리는 것은 사회주의 자체를 버리는 것이며, 진정한 혁명을 저버리는 것과 같다고 항변한다. 모든 계급과의 연대는 혁명을 변질시키고, 정치적 행동은 부르주아의 대변체인 국가를 더욱 강화시킬 뿐이라는 것이 카우츠키의 주장이었다. 물론 이 논쟁은 사회주의당 지도부에서 카우츠키의 주장을 채택함으로써 끝이 났다. 베른슈타인에겐 변절자 딱지가 붙었고 그의 입지는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결과는 어땠는가? 카우츠키가 몸담았던 독일의 사회주의당을 비롯해 전 유럽에서 사회주의당은 전멸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파시스트들이 자라나고 기득권 세력들이 판을 쳤다. 그나마 살아남은 사회주의당은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를 수용했던 스웨덴뿐이었다.
스웨덴 사민당은 교조적인 이론보다는 현실 정치에서 그들의 이념을 펼치기 위해 노력했다. 진정한 좌파가 무엇인지 따지며, 현실을 외면했던 카우츠키와는 달랐다. 그들은 상황이 요원하면, 우파와 연합하길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리고 정권을 잡았다. 스웨덴은 민주주의도 정착되지 않은 봉건적 국가였다. 사민당은 제1의 탄압대상이었다. 그럼에도 스웨덴에서 사민당이 정권을 잡을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현실에 입각한 열린 자세였다.
김규항은 2월10일치 칼럼에서 ‘오연호, 조국 같은 분들에게, 이명박인가 노무현인가는 정권은 물론 학술, 문화, 방송, 엔지오(NGO) 등의 헤게모니를 ‘우리가 갖는가 저들이 갖는가’가 달린 절체절명의 일이다’라고 지적했다. 그의 주장이 옳을 수도 있다. 그러나 현재 상황에서 그들이 진정한 진보의 가치를 대변할 수 있는가는 고려사항이 아니다. 중요한 고려사항은 진보가 집권하기 위해 그들과 연합하는 길이 더 생산적인가이다. 지금 진보는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프랑스의 마르셀 데아가 현실을 외면하는 프랑스 사회주의자들에게 가했던 일침을 소개하고자 한다. 그는 “사회주의자들은 다음 두 가지 방법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 부르주아 사회 내부로 들어가려는 모든 시도를 포기한 채 폭력적, 전면적, 필사적인 혁명을 준비하거나, 정부를 포함해 어떤 곳이든 들어가 어떤 종류의 싸움이든 해내야 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지금보다 상황이 열악했던 20세기 초반 사회주의자들도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행동했다. 21세기 초반의 한국 진보정당이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는 자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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