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1.04.01 19:58 수정 : 2011.04.01 19:58

3월16일치 곽병찬 칼럼 ‘다시 신의 존재를 묻는 이유’에 답함

이도흠 한양대 국문학과 교수

일본의 비극은 아직 진행형이다. 3인칭의 죽음임에도 현해탄의 거리를 뛰어넘어 크나큰 고통과 슬픔을 안긴다. 이 참사를 보며 묻는다. 과연 신이 있다면, 왜 아무런 죄를 짓지 않은 저 어린아이들마저 죽음으로 몰아넣는가?

며칠 전엔 쌍용자동차 노동자가 자살하였다. 벌써 이 회사에서만 14명의 노동자가 죽음 이외의 다른 방법을 찾지 못한 채 목숨을 끊었다. 그럼에도 이들에게 ‘사회적 살인’을 자행한 국가와 자본은 요지부동이다. 용산 희생자들의 장례식 때 물었다. 자본이 저리 탐욕스럽게 착취를 하는데도, 국가가 그리 선한 이들에게 그토록 야만스럽게 폭력을 행하는데도, 저항하여 저 불의를 몰아내지 못한다면 과연 우리 앞에 희망은 있는 것일까?

수경 스님은 여강가에서 매일 눈물을 흘리셨다. 문수 스님이 소신공양하신 뒤에는 자식을 먼저 보낸 아버지처럼 소리도, 눈물도 없이 꺼이꺼이 우셨다. 백기완 선생도 가까이 뵙고 보니 울보다. 건강한 청년도 1㎞를 따라가고서 한 달간 앓았다는데 스님은 200㎞를 오체투지하여 무릎 연골이 다 닳아버렸다. 선생은 죽음에 이르는 수십 차례의 고문에도 독재정권에 맞서서 추호도 소신을 굽히지 않으셨다. 아마 대한민국에서 가장 강한 두 분이리라. 모르는 이들은 두 분의 눈물을 보며 그리 강한 이에게도 약한 구석이 있는 게라고 말한다. 두 분과 같은 이들에게 공통점이 있다. 다른 능력은 보통 사람과 비슷하지만, 다만 한 가지, 공감 능력이 유달리 뛰어나다는 점이다.

캐나다의 한 학교에서 갓난아기를 데려와 학생들이 지켜보게 하였다. 이들이 갓난아기의 고통과 성취에 공감하는 체험을 한 이후 집단 괴롭힘이 없어졌다. 연약한 여자 아이가 다른 아이의 모자를 빼앗은 남자 아이에 맞서서 당당하게 모자를 돌려주라고 말했다. 이 ‘공감의 뿌리’ 교육에서 확인한 것처럼 정의와 용기는 바로 타인의 고통과 비극을 공감하는 데서 비롯된다.

이번 지진에서 일본인의 침착함에 전세계가 존경을 표하고 있다. 인류 문명의 진화 운운하는 외국 언론도 있다. 부모와 선생으로부터 남에게 절대 폐를 끼치지 말라는 말을 숱하게 들으며 이를 내면화한 그들의 문화는 칭찬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그 극한 상황에서도 줄을 서는 그들을 보면 소름이 끼친다. 오랜 친구나 부부끼리도 희로애락을 드러내지 않고, 특히 화를 내지 않는 그들을 보면 외려 정이 달아난다. 이것이 예를 갖춘 문명인의 모습일지는 몰라도 천황과 국가와 ‘오야붕’이 요구하는 질서와 복종의 언명에 철저히 구속된 ‘꼬붕’의 삶이자, 남에게 폐를 끼치거나 화를 내서 입게 될 상처와 죽음을 두려워한 자기방어적 처신이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한국인이 난장에서도 상생의 꽃을 피운 것은 공감의 능력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굶주리는 와중에도 우리 민족은 까치밥을 남겨두고 땄다. 찢어지게 가난한 살림에도 개다리소반을 걸어두고 거지가 오면 한 상을 차려주었다. 국가가 전혀 복지를 행하지 않는데도 국민들의 삶이 건전했던 것은 1970년대까지만 해도 이웃의 고통에 공감하는 이들이 주변에 널려 있었기 때문이다. 급속한 산업화, 개발독재, 신자유주의를 거치면서 시나브로 사라져버린 ‘공감의 연대’를 이제 되살려야 할 때다.

지진과 해일로 신음하는 일본인들, 부당하게 착취당하고 억압당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 그들의 고통에 공감하고 연대를 하는 그곳에, 이를 바탕으로 정의로운 실천을 행하는 그곳에 한국 사회와 인류의 희망은 있다. 신이 왜 없는가.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이는 그에게서 신을 발견한다.



광고

브랜드 링크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