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1.04.08 19:37
수정 : 2011.04.08 19:37
그는 서울대가 아니어도 어디서든
중요한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가 좀더 ‘비효율적’으로 살길
바라는 건 지나친 욕심일까
정혁 경기과학고 교사
5~6년 전만 해도 과학고 학생이 2학년을 마치고 갈 수 있는 대학은 카이스트(KAIST·한국과학기술원)와 포항공대뿐이었다. 대부분의 과학고가 그러했겠지만 과학고를 다니면서 최선은 2학년을 마치고 카이스트에 진학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몇년 전부터 서울대에 특목고 2학년을 대상으로 신입생을 선발할 수 있는 특기자 전형이 생겼고, 연세대·고려대·성균관대 등 이른바 서울권 대학들에도 비슷한 전형이 생겼다. 그러자 2학년을 마치고 서울대에 입학하는 것이 최선이 되었고, 2학년을 마치고 카이스트에 입학하는 것은 차선으로 밀렸다. 이른바 서열화가 된 것이다.
서울대를 정점으로 한 대학 서열화가 과학고와 카이스트 등을 잇는 대한민국의 이공계 정책마저 전도시켰다. 이제 학교 내신과 각종 대회 및 연구 실적이 우수한 상위권 학생들은 서울대에 진학한다. 그들이 서울대를 가고 싶어 하는 것은 객관적으로 서울대가 이공계 학생에게 최상의 연구 및 학습 환경을 제공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이 서울대를 선택하는 가장 큰 이유는 사회에서 서울대 학벌이 카이스트 학벌보다 우위에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들이 대학 서열화와 서울대 학벌을 경험하지도 않고 내면화하는 것은 그들의 부모를 비롯한 사회의 영향력 때문일 것이다. 이런 우수한 학생들이 들어가는 대학이 대한민국 최고 대학이 못 된다는 것은 아주 이상한 일일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본래 우수한 학생들이라면, 이 해괴한 대학 서열화 구조만 아니라면, 객관적으로 학습과 연구 환경이 좋은 곳에서 더 우수한 과학도로 성장할 가능성이 더 높은 게 아닐까? 카이스트든 포항공대든 더 좋은 환경 속에서 공부할 수 있음을 알면서도 학생들이 별 고민 없이 서울대를 선택하는 것은 분명 자연스러운 현상은 아닐 것이다.
대중매체에 큰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학생들은 정재승 교수나 안철수 교수 같은 분들을 롤모델로 삼는다. 그들이 카이스트에 있고, 그들을 볼 수 있으며, 그들로부터 배운다는 사실이 학생들의 진로에 영향을 주기도 한다. 특히나 안철수 교수는 2년 전 한 방송에 출연해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자기 자신을 긍정하면서도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그의 인생 철학은 경쟁에 매몰되어 있는 학생들에게는 큰 감동이었다.
그런 그가 카이스트를 떠난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그가 자리를 옮기는 곳이 하필이면 대한민국 모든 사람들이 선망하는 서울대다. 며칠간 그가 서울대 자리를 제의받고 갈지 말지를 고민한다는 뉴스를 보고는 그래도 쉽게 결정하지 않으리라는 일말의 기대를 했다.
김상봉의 <학벌사회>에 따르면 매년 서울대에 들어가는 학생은 수험생 가운데 0.5%밖에 되지 않지만, 그 출신들은 이 나라 대학교수의 4분의 1을 차지하며, 국회의원의 3분의 1 이상을 차지하고, 법조인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며, 행정부 최고위직의 3분의 2를 차지하고 있다. 아마도 이것이 사람들이 서울대 학벌을 선망하는 주된 이유일 것이다. 물론 나는 안철수 교수가 이런 이유로 서울대로 자리를 옮겼으리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또한 새로 만들어진 융합과학기술대학원에서 정말 중요한 일을 하리라 믿는다. 그러나 꼭 서울대가 아니어도 그는 어디서든 중요한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일 것이다. 그는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비효율적’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가 좀더 비효율적으로 살아가길, 그래서 교육의 전쟁터에서 자라나는 이 땅의 아이들에게 좀더 희망이 되어주길 바라는 것은 지나친 욕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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