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1.04.12 20:14
수정 : 2011.04.12 20:14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대한민국은 1965년 일본과 기본 조약을 맺어 국교를 정상화했다. 그러나 이 조약이 두 나라의 과거를 깨끗이 청산했다고는 볼 수 없다. 독일연방공화국(서독) 정부는 제2차 세계대전 뒤 승전국들뿐만 아니라 주변국들과의 모든 문제를 합리적으로 해결했으며, 전쟁이 끝난 지 60년이 넘은 현재에도 전쟁 범죄자들을 색출·처단하고 있다. 그럼으로써 이웃 나라들과의 ‘적대관계’뿐만 아니라 ‘적대정서’까지 해결했다. 그러나 일본은 그렇지 못하다. 한-일 기본 조약을 체결한 것도 배상이 아닌 경제협력과 한국의 독립 축하 등의 명목으로 당시의 군사정권을 매수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국제법의 절차에 어긋나는 강요로 이루어진 이른바 을사보호조약과 경술병탄에 대한 사과 한마디 없이 끝을 내려고 한 것이다.
독일은 수상이 유태인들이 학살당한 현장에 가서 무릎을 꿇고 누가 보아도 진심을 느낄 수 있는 태도로 눈물을 흘리는 것과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일본 자체만 해도 마땅히 전범으로 처단받아야 할 천황이 존속되었을 뿐만 아니라 전범자들이 수상직에 오르고 요즘까지도 전범자의 후손들이 판을 치고 있는 형편이다. 2차 대전 뒤 소련이 폴란드 동부의 상당 부분을 소련령으로 편입시켰다. 반면 오데르와 나이세, 두 강의 동쪽 10만㎢ 정도의 방대한 지역을 소련의 위성국가라고 할 수 있는 독일민주공화국(동독)과의 조약으로 폴란드에 넘겨주었다. 그 넓이는 현재 통일된 독일 면적의 3분의 1에 달하는 것이었다. 서독 정부는 당연히 여러 해 동안 이를 승인하지 않았다. 그러나 1970년 빌리 브란트 서독 수상은 이 지역을 두 나라의 국경으로 삼는 데 동의했으며, 독일과 폴란드는 이어 상호불가침 조약을 맺어 두 나라 사이의 몇백년에 걸친 적대관계를 청산했다. 그런데 일본은 어떠한가? 지리적으로나 역사적으로 한국 영토일 뿐만 아니라 과거 60년 이상 한국이 영유하고 있는 0.186㎢에 지나지 않는 바위섬을 지금도 자기들의 영토라고 우기고 있다.
우리 신문들은 과거에 있었던 일본의 대지진에 관하여 언급했으며, 1923년 9월에 일어난 간토(관동)대지진에 관하여도 보도가 있었다. 그러나 연일 지진과 해일 보도를 하면서도 우리 동포 약 1만명이 학살당한 사실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반면 미국의 <뉴욕 타임스>는 해일 발생 당일 언론인이며 작가인 조슈아 해머의 기고를 통해서 간토대지진에 관한 회고와 더불어 당시 미국인 희생자가 150명 있었음을 상기시켰다.
1923년 9월1일 일본 간토 지방에서 일어난 대지진으로 진앙지 부근인 요코하마는 전파되었다. 그리고 일본식의 목조건물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도쿄에 대화재가 발생하여 도쿄의 60%가 타버렸다. 이 지진으로 약 15만명의 목숨이 사라졌다. 그런데 일본의 극우파들은 이것을 편협한 민족주의를 고취하는 기회로 삼기도 했다. 이들은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약을 넣었다느니 혹은 사회주의자들과 공모하여 폭동을 일으키려 했다느니 하는 터무니없는 유언을 퍼뜨리며 우익 깡패들이 선두에 서서 조선인 노동자들과 일본인 사회주의 인텔리와 노동운동가들을 닥치는 대로 학살했다.
이번 지진해일이 일어나자 방송국마다 앞다투어 일본을 위한 모금을 할 뿐만 아니라 거리의 모금까지 등장했으며 재벌들도 거금을 내놓고 있다. 더구나 전례 없이 때아닌 ‘자선냄비’까지 나타났다. 수십만명의 인명을 앗아간 동남아의 지진해일 참변 때는 볼 수 없었던 현상이다. 혹자는 우리가 이렇게 행동함으로써 한-일 사이의 관계가 좋아질 것이라는 주장까지 하고 있다. 한편 우리는 일본을 위하여 그야말로 퍼주고 있는데, 일본은 독도가 일본 영토라고 교과서에까지 올리는 것을 공식화했다.
우리는 과거를 용서할 수는 있어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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