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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1.04.12 20:14 수정 : 2011.04.12 20:14

카이스트 전액장학금의 이유에 대해
흔히 ‘우수한 애들이니까’라고 말한다
이때 거울을 보자
서 총장이 당신을 보고 있지 않은지

박경신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국가가 능력 있는 사람들에게 지원을 몰아줘야 한다는 생각은 성장 위주의 사고방식이다. <정의란 무엇인가>는 능력주의 자체가 불공정한 특혜임을 국내에 가장 널리 소개하여서 의미가 있다. 약자를 돌봐주는 것이 국가의 의무이며 이를 우리는 복지라 부른다. 국가가 강자를 지원한다면, 그것은 그가 자신의 능력을 사회를 위해 헌신한다거나 또다른 뚜렷한 공익적 목표를 달성하는 경우로 한정되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무변촌이나 무의촌 개업을 약속하는 법·의대생에게 장학금을 주는 것 또는 전인류적 가치가 있는 기술을 개발하는 자에게 투자하는 것 등이다.

그러므로 성과에 비례한 차등지원인 인센티브 제도는 모든 사람들에게 더욱 노력할 동기를 부여하여 전체적인 성과를 높이는 범위 내에서만 정당화된다. 그 혜택이 과도하여 수혜자가 비수혜자를 억압할 수 있다거나 비수혜자의 노력 의지를 없애버리는 경우 약자를 처절하게 도태시키는 역(逆)복지, 즉 특혜가 된다.

이러한 ‘강자’를 위한 복지는 예산 낭비를 넘어서서 특권층을 만들어내어 사회정의를 파괴하고 교육을 왜곡시킨다. 대표적인 예로, 변호사들의 시장독점을 보호해온 변호사 정원제는 전관예우와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낳았고 수십만명의 고시낭인을 만들어내었다. 사법시험에 합격하지 못해 자살하는 사람들도 꾸준히 있어 왔다.

이렇게 모든 복지는 수혜자가 누구인지, 혜택이 과도한지에 대해 주의하지 않으면 언제라도 특혜가 될 소지가 있다. 복지는 항상 복지로부터 배제된 사람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복지는 항상 전사회적으로 사고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반값 등록금을 요구하는 사람들은 항상 대학을 다니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어떤 대책을 마련할지를 생각해야 한다.

다른 대학들은 학생들에게 거의 주지 않는 전액장학금을 학생 대부분에게 주면서 학생 일부만 주지 않는 것을 ‘징벌’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 카이스트에서만 ‘징벌’이 될까? 현재 하위 4%가 전액수업료를 내고 있다고 하는데, 이렇게 소수만 탈락했을 때 발생하는 낙인효과와 그러한 낙인의 두려움이 다수의 카이스트 학생들을 불안감으로 몰아넣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전액장학금 수혜자가 거의 없는 다른 대학의 대다수 학생들은 낙인효과는 아니더라도 지금의 카이스트 학생들과 비슷한 불안감 속에서 살고 있다. 대학생 자살은 매년 200명이 넘는다. 대기업 중심의 경제체제가 부르는 턱없이 적은 ‘인간적인 일자리’의 수, 그리고 이를 보완해 주지 못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저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정부예산과 그중에서도 오이시디 최소의 복지예산 비율이 세계 최고의 자살률로 이어지고 있는 사회 전체에 승자독식 구조가 엄존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이 승자들 중의 하나인 카이스트생들에게만 국가 지원으로 제공되는 전원 전액장학금은 ‘승자독식’ 제도의 하나로 전락할 위험이 항시 존재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서남표 총장의 우려였던 것 같다. 이 우려의 해소책은 여러 가지가 가능했다. 모두에게 일률적으로 적정액의 수업료를 내도록 하거나, 부유한 학생들에게는 장학금을 주지 않거나, 이공계 취업자 또는 이공계 대학원 진학생들에게만 등록금을 환불해줄 수도 있었다. 또는 다른 모든 대학들처럼 전원 전액장학금 제도를 폐지하고 성적우수생들에게만 전액장학금을 주는 방식을 택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서 총장은 이 마지막 방식을 택했던 것뿐이다. 서 총장은 복지가 특혜로 바뀔 위험을 또 하나의 특혜(능력주의)로 막아보고자 했던 것이다.

언론은 서 총장의 선택을 학내에서의 ‘승자독식’, ‘줄세우기’라고 말하지만 카이스트는 다른 대학과 달리 상대평가를 의무화하지는 않았다. 이 차이는 크다.

절대평가는 자신의 실력을 평가받지만 상대평가는 ‘타인’의 실력에 의해 자신을 평가받는다. 각자 자신의 ‘타인’들이 얼마나 열심히 할지 모르니 심신을 쥐어짤 수 있는 최대한 혹사시킨다. 무한경쟁은 상대평가의 산물이다. 매년 중고등학생 자살이 200명에 육박하고 그 원인의 상당수가 ‘성적’인데 이들의 ‘성적’이 오르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사회구조가 카이스트를 포함한 몇개의 명문대에 입학하려는 경쟁을 과도하게 치열하게 만들고 그런 이유로 내신 등급을 상대평가로 매기는 대한민국에서는 이들의 성적은 학력이 아니라 ‘등수’이기 때문이다. 급우들이 똑같이 죽어라고 공부하는데 왜 자기 등수만 오르겠는가. 이것이 진짜 승자독식이다.

무상 대학교육은 우리의 미래일 수 있고 그렇게 확대되어야 할 ‘해방구’를 서 총장이 파괴했다는 분노가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어차피 카이스트도 숨막히는 대학입시의 경쟁을 뚫어낸 성적우수자들만을 뽑는다면, 카이스트의 전원 전액장학금 제도 자체가 사회 전체적으로는 자살을 양산하는 승자의 특혜 중 하나로 기능하지 않도록 항상 세심하게 관찰해봐야 한다.

도리어 서 총장은 성적우수자만을 뽑아왔던 카이스트 입학제도를 혁신하여 실업계에도 문호를 개방하였다. 서 총장의 측근은 입학제도 혁신과 차등적 장학금 제도를 함께 묶어 “좋은 대학에 오기만을 위해 온 힘을 다 쏟고는 좋은 대학(카이스트)에 왔다는 이유만으로 전액장학금의 혜택을 누리는 상황을 바꿔보고 싶었다”고 말한다.

카이스트의 전원 전액장학금 제도가 ‘가난한’ 이공계의 해방구였던 것은 맞다. 25년 전 필자도 그런 절절한 마음으로 입학시험에 응시했고 그 혜택을 지금도 톡톡히 보고 있다. 또 서 총장에게 ‘가정 형편에 따른 차등화’와 같은 다른 선택은 불가능했는지 묻고 싶기도 하다. 그러나 서 총장에게 모든 걸 뒤집어씌울 수는 없다. 누군가 ‘왜 카이스트생들에게만 국민의 세금으로 전액장학금을 주는가’라고 물을 때 우리는 흔히 ‘우수한 애들이니까’라고 답한다. 이때 거울을 보자. ‘우수한’ 상위 90%에게 장학금을 주려 했던 서 총장이 당신을 바라보고 있지 않은지.

법무부가 변호사 시험에서 25%를 반드시 불합격시키겠다고 공언했고 우리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다시 제자들의 장례식을 준비해야 할지 모른다. 이렇게 훨씬 더 비인간적인 상대평가들은 카이스트 밖에 수도 없이 널려 있다. 서 총장에 대한 마녀사냥은 이들을 혁파하기 위한 논의들을 중단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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