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차 단협안의 근본적인 원인은
좋은 일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의 가장 큰 원인 중 하나는
재벌이 지배하는 사회다
이계안 2.1연구소 이사장·전 현대자동차 대표
현대자동차 노조가 정년퇴직자와 25년 이상 장기근속 직원의 자녀를 우선 채용하는 내용을 담은 단체교섭안을 20일 확정했다. 단협안은 ‘회사는 신규 직원 채용시 정년퇴직자 및 25년 이상 장기근속자의 자녀에 대해 채용 규정상 적합한 경우 우선 채용함을 원칙으로 한다’고 규정했다. 노조는 ‘이를 위한 가점 부여 등 세부사항은 별도로 정한다’고 규정에 덧붙였다.
현대차 노조의 이런 단협안은 위기에 처한 우리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성장률은 높다고 하는데 우리의 삶은 더욱 궁핍해지고,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는 없이 “나만 잘살면 되지”라는 의식이 팽배한 현실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물론 노조의 존재 이유를 생각해 보면 이런 요구가 나올 수도 있다. 말 그대로 노조는 조합원의 이익을 위해 존재하는 이익집단이다. 그러므로 노조원의 가장 중요한 현안을 해결하기 위해 활동할 수 있다. 자식의 취업을 걱정하는 부모의 입장에서 볼 때 자식이 좋은 직장을 구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은 당연한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눈을 좀 크게 뜨고 최근 우리 사회에 가장 큰 논란이 되었던 문제를 살펴보자. 이 정부의 장관이 자신의 딸 특혜 채용 문제로 인해 공직에서 물러났던 것이 지난해의 일이다. 대학 입학에서 ‘기여입학제’ 도입을 둘러싸고도 많은 비판이 뒤따르고 있다.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나만 잘되면 된다”는 식으로 행동하는 것은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만이 존재하는 살벌한 사회이다. 이런 사회가 유지될 수 있을까?
우리나라의 노동운동은 강자인 기업가에 대한 비판을 통해 성장해왔다. 이 과정에서 우리 사회의 기득권이 갖는 문제점을 적극 비판하였기 때문에 일반 국민들의 성원을 받으면서 성장하였다. 그런데 최근 노동운동은 일반 국민들의 호응을 받지 못하고 있다. 왜 그럴까? 바로 자신들이 기득권세력이 되어버린 것이다. 약자를 배려하지 않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는 존재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현시점의 노동운동에 있어 약자는 바로 비정규직 문제이다. 현대차의 비정규직 문제는 우리 경제가 나아갈 수 있는 방향을 잴 수 있는 시금석이다. 필자는 ‘비정규직에 대해 임금을 더 주는 사회적 대타협’을 이끌어 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현대차의 정규직 노조는 이 문제에 대해 어떤 대안을 갖고 있는가? 현대차 단협안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로 취급되어야 하는 것은 바로 이 문제이다.
그런데 현대차 노조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는 이른바 ‘세습 채용’에 나선다니 이건 문제이다. 노조가 그들과 같은 현장에서 일하는 다수의 비정규직, 나아가 국민들의 외면을 받을 수밖에 없는 길로 들어서는 것이다. 과연 이런 상황에서 누가 노조의 주장에 귀를 기울여줄까? 아무도 없다. 비정규직 문제에 적극 대응하는 것, 이것이 정규직 노조가 새롭게 발전할 수 있는 기반이 될 것이다. 사실 현대차 노조의 단협안이 제기된 근본적인 원인은 우리 사회가 좋은 일자리를 만들어 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이 된 가장 큰 원인 중 하나는 튼튼한 중소기업이 설 자리를 찾지 못하고, 거의 모든 영역에서 재벌이 지배하는 사회가 된 것이다. 누구도 새로운 사업을 찾아서 도전하지 못하는 사회, 아무리 열심히 해도 큰 부자가 될 수 없는 사회가 된 것이다. 이런 사회에서는 좋은 일자리가 만들어질 수 없다. 새로운 것을 만들 수 없기 때문에 기존의 것을 지키는 것에 주력하는 것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우리 사회에 사회적 이동성을 떨어뜨리는 장벽을 제거하기 위한 제도를 만드는 것이다. “성을 쌓으려는 자는 망하고 길을 뚫으려는 자는 흥한다”는 경구를 되새겨야 할 때이다. 정규직이 비정규직은 들어오지 못하는 성을 쌓지 말고, 비정규직과 소통하는 길을 열어야 하는 때이다. 누구나 새로운 아이디어를 가지고 도전하면 성공할 수 있는 사회, 이것이 성을 쌓지 않고 길을 여는 것이다.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