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1.07.11 19:21 수정 : 2011.07.11 19:21

박경신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황당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아이비엠(IBM)은 2003년에 자사의 마이크로칩 및 하드디스크 공장에서 200여명의 노동자들이 트라이클로로에틸렌·벤젠 등의 발암물질에 노출되어 암에 걸렸다며 민사소송을 제기하자, 노동자들의 청구는 산업재해(이하 산재)로 처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2004년 2월 노동자 2명에 대한 선도 소송에서 승소한 이후에도 오히려 2004년 6월과 2005년 7월 각각 나머지 노동자들 모두와 합의하여 산재 수준 이상의 보상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2011년 삼성은 자신의 반도체공장 노동자들의 비슷한 상해에 대해 산재 인정을 거부하고 있고, 법원이 산재인정 판결을 한 이후에도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왜 비슷한 사안을 두고 두 거대 기업은 상반된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일까?

산재보상제도란 무엇인가? 근대의 산재보상제도는 1884년 독일의 비스마르크에 의해 처음 제시될 때부터 일종의 대타협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즉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업무와 관련된 모든 상해나 질병에 대해서는 사용자 쪽의 과실 유무에 관계없이 사용자가 책임을 지되 보상액수를 일반 민사소송의 손해배상액 수준 이하로 한정하여 사용자의 경영 상태에 주는 영향을 최소화하기로 한 것이다. 이러한 산재보상제도는 전세계에 확산되어 우리나라에도 도입되었으며 이 대타협의 취지는 ‘신속한 보상’을 목적으로 한다는 우리나라 산재법 법문에 살아있다.

이렇기 때문에 산재보상제도가 시행되는 나라들에서는 산재 신청이 제기되면 대부분의 고용주들은 되도록 빨리 산재 처리에 응하려고 한다. 상해가 업무와 관련이 없다고 다툴 수는 있지만, 산재 처리가 된다고 해도 고용주의 과실이 입증되는 것이 아니고 대신 보상액수는 일반 민사소송에 비해 훨씬 더 적게 한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산재보상제도는 대부분의 나라에서 보험으로 운영되어 고용주는 이미 지급한 보험료가 아까워서라도 산재 인정을 다투지 않는다. 많은 보험료를 내놓고 직장에서 다친 근로자들에게 생색낼 기회를 차버리는 건 바보짓이다.

같은 이유로 아이비엠도 일반 민사소송을 막기 위해 자발적으로 산재 처리를 주장하였다. 특히 아이비엠과 같이 ‘클린 이미지’를 유지해온 기업은 신속한 처리를 통해 부정적인 여론을 피함은 물론 근로자들이 부딪힌 불행에 대해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급선무였다.

이렇게 보면 삼성이 전세계 대부분의 고용주들이 ‘안식처’로 삼는 산재보상마저 거부한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산재를 인정한다고 해서 삼성의 과실이 입증되는 것도 아니다. 벤젠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삼성의 말이 사실이라면 더욱더 앞으로 비슷한 발병도 없을 것이니 추가비용도 발생하지 않을 것인데, 왜 자신에게 유리한 산재보상마저 회피하려 하는 것인지.

물론 돈 때문이 아니라 ‘클린 이미지’ 때문일 수 있다. 그러나 숯검댕도 발암물질이고, 일상생활에서도 항상 발암물질을 조금은 접하고 사는 판국이다. 반도체나 컴퓨터 관련 생산업체들의 노동자들이 다른 업체들보다 발암률이 높은 것도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합리적인 고용주라면 과거의 발암물질 사용을 인정하고 (이것이 과실은 아니므로) 신속히 산재 처리를 하여 미래의 클린하고도 인간적인 이미지를 추구할 것이다.(삼성도 아이비엠처럼 모든 피해 노동자들에게 일괄 합의를 제시했다면 ‘돈으로 막으려 한다’는 비난을 듣지는 않았을 것이다.)

근로복지공단이 이번 법원의 삼성반도체 백혈병 산재 인정 판결에 항소한다면 그야말로 국제적 망신이 될 것이다. 산재보상제도는 노사간의 가장 불행한 대립 상황을 원만하게 해결하기 위해 정부가 나서서 제시한 대타협이다. 지금 근로복지공단이 나서서 항소를 하면 정부가 노사관계를 더욱 대립으로 몰고 가겠다는 것이며 산재보상제도의 정신을 해치는 것이다.



광고

브랜드 링크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