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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김선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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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어린 시절 ‘공짜 과외’가 성공의 디딤돌 된 한 의사의 무상급식론
임경린 경기도 엘에스 정형외과의원 원장
요 며칠 고흐의 해바라기를 보고 있다. 갑자기 그림에 관심이 생겨서가 아니다. 아내가 고장 난 티브이를 치운 벽에 해바라기 그림을 세워놓았기 때문이다. 흉물스럽게 드러난 콘센트를 가리기 위한 깜찍한 미봉책이었다. 하지만 소파에 앉아 멍하니 티브이를 보는 습관을 버리지 못한 나는 사라진 화면이 아쉬워 두리번거렸다. 그때마다 고흐의 해바라기가 서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해바라기의 움직임에 놀라 바짝 다가앉았다. 그림 속의 해바라기는 정물이 아니라 한여름 태양 아래 서 있는 그대로였다. 위로는 뜨거운 태양이 쏟아지고, 꽃잎은 건조한 바람을 타고 흔들리고 있었다. 문득 서정주의 시구가 떠올랐다. “스물세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
인간의 삶에는 자신만의 동기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흐를 움직인 건 강렬한 태양과 뜨거운 바람이었는지도 모른다. 서정주를 시인으로 만든 건 젊은 날의 지독한 방황이었으리라. 그리고 언젠가 이외수는 가난과 배고픔이 지금의 자신을 만들었다고 했다. 그러면… 나는 무엇이 만들었을까? 나에게도 가난과 긴 방황이 있었지만, 예술가들처럼 시련에서 삶의 정수를 찾지는 못했다. 하지만 현실적인 동기 하나를 찾아냈다. 그것은 바로 ‘무상’이었다. 이는 모든 것이 덧없다는 ‘무상’이 아니라, 대가없이 주어지는 행위, ‘공짜’를 말한다. 만약 이것이 없었다면 나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1970년대 중반, 나는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그해 겨울, 일없이 골목을 빈둥거리는데 옆집 누나가 손짓하여 불렀다. “너, 영어 배울래?” 당시 영어는 알파벳 대문자만 겨우 구별하는 정도였다. 누나에게는 나와 동급생인 동생이 있었는데, 딸만 많은 집의 독자였다. 아마 귀한 동생에게 영어를 가르치려는데, 교육 효과를 위해 나도 포함시키려는 모양이었다. 이유야 어쨌든 공짜로 배울 수 있다는 말에 두말 않고 달려갔다. 그렇게 한달 남짓 배워 기본 영어를 이해하게 되었다. 그러나 중학교 과정은 생각보다도 어려웠다. 다들 어디서 배웠는지 영어·수학을 너무 잘해서 저절로 주눅이 들었다. 결국 첫 시험에서 처참한 성적을 받고는 성적표를 한동안 가방에 숨기고 다녔다.
이듬해에 다시 기회가 찾아왔다. 당시에는 담임선생님이 학생 집을 방문해서 부모와 면담하는 ‘가정방문’이라는 제도가 있었다. 그래서 유능한 영어교사였던 담임선생님이 우리 집에도 다녀가셨다. 당시 집에는 아버지가 병석에 누워계셨고 어머니는 출근하고 안 계셨다. 며칠 뒤 선생님께서 찾으셨다. 선생님은 내 손을 잡고 빙긋이 웃으시더니, 수업이 끝나면 매일 당신 댁으로 오라고 하셨다. 그러면서 책을 한권 내미셨다. 책은 지금도 서점에서 볼 수 있는 문고판 영문소설이었다. 그날부터 나는 한동안 영어를 잘하는 친구들 사이에서 끼어서 기초적인 영문학을 접하게 되었다.
영어를 이해하면서부터 다른 공부는 저절로 되기 시작했다. 성적은 시험을 볼 때마다 계단에 올라서듯 했다. 그동안 과외교실에도 변화가 생겼다. 선생님 소문을 듣고 학생들이 모여들더니, 몇달 새 수강생이 배로 늘어난 것이다. 하지만 선생님 댁에는 방이 더 없어 우리는 서로 끼어 앉아 불편하게 공부를 해야 했다. 그때,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사건이 터졌다. 나를 포함한 학생 몇이 돈을 안 낸다는 사실이 알려진 것이다. 과외 학생들이 모여서 수군거리더니, 급기야 학부형들이 찾아와 정식으로 항의하는 소동까지 생겼다. 공짜로 배우는 아이들 때문에 돈을 내고 배우는 학생들이 피해를 본다는 것이었다. 나를 포함한 공짜 학생들에게는 더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다시 선생님이 부르셨다. 이번에는 오랫동안 말씀을 하셨다. 하지만 나는 그때 선생님의 말씀을 기억하지 못한다. 다만 손으로 전해오는 온기를 우주의 에너지처럼 신비롭게 느꼈을 뿐이다.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당시 힘들었던 점은 나를 배려하신 선생님이 도리어 미안해하신다는 것이었다. 그 뒤로 한동안 나의 소문은 조금씩 살이 붙은 채 퍼져나갔고, 사건을 주도한 사람이 누구였는지는 저절로 알게 되었다. 나는 선생님에 대한 고마운 마음과 친구들에게서 받은 모멸감 사이에서 방황하다 차츰 세상을 알아가게 되었다.
하지만 그 일과는 관계없이 옆집 누나와 영어선생님께 공짜로 배운 공부는 나에게 소중한 토양이 되었다. 후에 의대에 진학하고 지금의 직업을 갖는 데 꼭 필요한 출발점이었다. 하지만 지금껏 선생님께 어떤 감사의 표현도 못 한 채 부채의식만 안고 살고 있다. 그래서 가끔 내가 대가 없이 남에게 도움을 주거나 일부러 어려움을 감수한다면, 이는 많은 부분이 선생님에 대한 채무에서 출발한 것이다.
요즘 무상급식이 화제다. 선거까지 해서 저지하려는 사람도 있고, 여기에 정치적 명운을 건 사람도 있단다. 얕은 현실 인식에 아쉬움이 남는다. 지금은 자식 교육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젊은 부부들이 출산을 포기하는 시대가 아닌가. 이제는 내 어린 시절의 옆집 누나나 영어선생님 같은 헌신적인 사람들에게만 교육을 맡겨둘 수 없는 세상이다. 정책과 예산이 필요하다면 책임진 사람이 머리를 짜서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학생들이 계층간의 갈등에 상처받지 않고도 올바른 지식과 국가관을 체득할 수 있도록 국가가 배려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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