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1.09.28 19:31
수정 : 2011.09.28 19:31
김선우 시인·소설가
어느새 가을이다. 하늘이 높아지면서 저녁노을 고운 날들이 많아졌다. 그 노을 바라보다 눈물 고인다. 35미터 공중에서 다시 추운 밤을 맞아야 하는 그녀 생각에 가슴이 아려온다. 저 서러운 역사를 가진 85호 크레인을 꽃피는 ‘크렌나무’로 바꾸고 있는 사람. 크레인에서 죽어간 동료들 생각에 8년간 보일러를 틀지 못했다는, 먹는 거, 입는 거, 쓰는 거, 뜨뜻한 거, 시원한 거, 다 미안했다는 사람. 속 빈 유행어처럼 사방에서 ‘공감과 소통’을 떠드는 시대에 공감능력 이백퍼센트의 이토록 곡진한 영혼이 지금 저기 중천에서 사위고 있다.
물론 그녀는 여전히 해맑고 씩씩하다. 유머러스한 트위트 글들로 지상과 소통하며 두 팔을 올려 하트를 그린다.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절망의 순간들에 홀로 견디는 중천의 고독을 따뜻한 유머와 미소로 제련해내는 그녀의 연금술. 이토록 눈물겹고 뜨거운 연금술은 지상의 우리를 오히려 위로하며 ‘나는 괜찮아요, 지상의 저 숱한 곳들에 저토록 아픈 사람들, 그들을 봐 주세요’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녀는 사람이다. 우리와 같은 몸을 가졌다. 열 걸음 걸으면 다시 뒤돌아 걸어야 하는 좁디좁은 크레인. 260일 넘게 거기서 먹는 게 먹는 게 아니고 자는 게 자는 게 아니고 씻는 게 씻는 게 아닌 생활을 하면 어떤 몸이 견디겠는가. 20대 청년들에겐 어머니뻘 되는 여자가, 30~40대에겐 언니 같고 누님 같은 나이 오십 넘은 여자가 저기 중천에 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끊임없이 몰려드는 죽음의 기척을 매 순간 생의 기척으로 바꾸어 내면서 그렇게 견디고 있다.
국제적 망신이므로 부산국제영화제 기간 중 희망버스 오지 말라는 부산시의 성명을 듣고 아이쿠, 했다. 예술은 삶을 위해 존재한다. 특히나 영화예술은 현실세계와의 접점이 생명인 대중예술이다. 불의에 고분고분한 영화는 본질적으로 없다. 영화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클린트 이스트우드 같은 공화파 보수 영화인이 <밀리언달러 베이비>나 <그랜 토리노> 같은 걸작들을 만들겠는가. 제정신 가진 영화인이라면 동시대 이웃의 고통에 연대하려고 자발적으로 제 돈 들여 그곳까지 가는 시민들을 부끄러워할 수 없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 최소한의 의무도 이행하지 않는 반윤리적이고 탐욕한 대기업의 작태, 그로 인해 건강한 다른 기업들조차 욕 먹이는 욕심 사나운 대기업주, 그런 뻔뻔한 악덕기업에 대한 집권 여당의 여전한 비호, 국정조사를 요구하는 노동자들을 피해 도망 다니는 집권 여당 대표, 인권의 기본 개념조차 무지한 인권위원들이 득시글거리는 인권위, 대기업 비호 용병으로 전락한 공권력, 아이쿠, 국제적으로 망신스러운 것들이 이렇게 수두룩하건만 어디다 대고 망신이라 하시는지!
5차 희망버스가 시동을 건다고 한다. 사실, 그동안의 희망버스로 시민들은 할 만큼 했다. 나머지는 정부와 집권 여당이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그런데 그걸 하지 않으니 시민들이 다시 움직인다. 날 더 추워지기 전에 그녀는 크레인을 걸어 내려와야 한다. 죽음을 각오하고 크레인에 오른 그녀를 살아서 내려오게 하기 위해 시민들이 간다. 무엇을 하라고 있는 게 ‘정치’인지, 희망버스 앞에서 집권 여당은 두려운 마음으로 스스로에게 물어보길 바란다.
한심한 정치를 가졌으나 깨어 있는 시민들이 만들어내는 감동의 다큐멘터리가 때마침 영화제 기간에 펼쳐진다. 뜻하지 않게 영화제에 초대되었으니 즐겨볼 만하겠다. 사랑해요! 힘내요! 고마워요! 마음속에 피어오르는 이 우정의 힘으로 사랑을 구현하려는 우리들. 이것은 절박하고 아름다우며 긴급한 소풍이다. 김진숙 그녀가 부르던 ‘직녀에게’가 사무친다. 이별이 너무 길다. 슬픔이 너무 길다. 우리는 만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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