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갑 한국풍력에너지 대표이사
당국의 방침으로 법대 선택 가능했다
유신독재에 항거하여 퇴학당한 그에게
미안할 일이지, 어찌 비판할 수 있는가?
1979년 10월26일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게 암살당하자 박정희 군사독재에 항거한 학생운동의 피해자들에게 보상차원에서 80년 3월 복학방침이 내려졌다. 그때 서울대 당국은 아직 전공을 정하지 못한 1학년 징계피해자(유기정학·무기정학·퇴학)들에게는 세가지 보상책을 제시했다. 첫째, 전공 선택권을 줘서 각자가 원하는 학과를 선택하게 했다. 1학년 때 징계를 당했기 때문에 2학년 때 배정받는 전공학과를 선택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전공학과 결정은 1지망·2지망으로 나누어 성적순으로 결정했는데, 1학년 학점 점수가 없어 전공학과를 결정할 수 없었기에 대학 당국이 1학년 학생들은 무조건 2학년 전공학과로 배정하기로 하고, 학과 선택권을 주었던 것이다. 만약 박원순 서울시장 후보가 80년에 서울대에 복학신청을 했으면, 본인이 원하면 사회계열의 전공학과였던 법학과(75년 당시는 법학과가 사회계열이었고, 나중에 법대로 독립한다)를 선택할 수 있었다. 둘째는 80년 1학기 등록금은 전액 장학금으로 주기로 했으며, 셋째는 1학년 징계 학기 성적을 신청한 교과목 교수의 동의로 처리하기로 했다. 따라서 박원순 학생은 사회계열의 법학과를 본인이 원하면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이다.그것은 특혜가 아니라 이미 많은 고통을 당한 민주화운동 학생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일 뿐이다. 동급생보다 4~5년 늦게 진학하면 이후 설사 사법고시를 합격하여 공직에서 일한다 하더라도 어떤 불리한 상황인지 조금만 생각해봐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박원순은 복학신청을 하지 않았기에 자신이 법대 중퇴라고 하는 것은 사실에 부합하지 않으며, 이 점은 박원순 후보가 사과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이에 대해 한나라당과 나경원 후보가 학력시비를 계속하는 것은 마치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 침략을 부정하고, 조선이 합방을 원해서 했다고 억지 부리는 것 같아 받아들이기 어렵다. 청운의 꿈을 품고 서울대 사회계열(박원순이 입학한 75년 서울대는 계열별로 모집하여 사회계열에는 법대·경영대·사회과학대가 함께 있었다)에 입학한 지 3개월여 된 박원순이 구속되고 퇴학처분된 사유가 다름 아닌 박정희 유신독재에 맞서 할복자살한 서울대 농대생 김상진 학생의 추모행사에 단순 참가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75년 4월11일 서울대 농대 김상진 학생의 할복자살은 대학가는 물론 정치권에도 큰 파장을 불러오고 있었다. 이에 놀란 박정희 유신독재 정권은 같은 해 5월13일 긴급조치 9호를 발동하여 일체의 집회를 금지하고, 세 사람만 모여도 처벌하는 초헌법적인 조처를 취해 일체의 비판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긴급조치 9호가 발동된 지 채 한달도 되지 않은 5월22일 서울대에서 김상진 추모모임이 있었다. 박정희 유신독재는 초강경 처벌을 하게 된다. 이것이 이른바 ‘522사건’이다. 참석한 100여명을 모조리 처벌한 초유의 강경 조처로 이때 박원순은 대학 1학년인데도 구속되고, 서울대에서 퇴학을 당하게 된다.
유신독재를 반성할 일이지, 유신독재에 항거하여 서울대에서 퇴학당한 박원순 후보에게 미안할 일이지, 어찌 이를 비판할 수 있는 일인가? 참으로 한심하고 최소한의 역사의식도, 민주의식도 없는 소치이다. 아프리카에서 벌어지고 있는 민주화 투쟁을 뉴스를 통해 보고 있다. 1980년 5월의 광주, 1987년 6월의 한국과 무엇이 다른가? “민주주의란 나무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고 김상진 학생의 양심선언문이 생각난다.
나는 서울대 1학년이던 1979년 9월20일 학내시위 참여와 서울 용산구 남영동 시내시위 참가중 경찰에 잡혀 구류처분을 받고 서울대 당국의 유기정학 처분을 받았다. 그 뒤 80년 3월 학생운동 관련 징계자 구제조처에 따라 2학년 전공학과는 내가 원하는 농학과를 선택했고, 80년 2학년 1학기는 전액 장학금을 받았다. 유신독재 시기에 동시대를 살면서 박원순 후보와 동일한 경험을 한 사람으로서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밝히는 것이 민주시민으로서 기본적인 책무이기에 오늘 그것을 밝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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