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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1.11.02 19:25 수정 : 2011.11.02 19:25

최태준 인천시 남동구 만수6동

나는 대한민국의 평범한 고3이다. 썩어빠진 입시제도와 제도권 교육을 맹렬히 비난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논리에 아주 충실하게 순응하고 있는 ‘한심한’ 고3이다. 세상에 이런 모순덩어리가 또 있을까 싶기도 하지만, 이런 지극히 ‘소시민적인’ 태도가 비단 나 혼자만의 전유물은 아닐 거라고, 대한민국 고3 중 누군가는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 거라고 자위하면서 나는 오늘도 ‘교육방송 수능특강 파이널 실전모의고사 외국어 영역’을 붙들고 빨간 동그라미 개수를 세며 하루를 보낸다.

지금까지도 나의 목표는 ‘대학’이다. 내 어깨에 얹힌 가족이라는 부담과 더불어 ‘내가 배우고 싶은 것을 배울 수 있는 곳’이 대학이라는 환상을 여전히 가슴속 한편에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나 역시 학벌 중심 사회에 대해서는 아주 강도 높게 날을 세우고 비판하지만, ‘교육’이라는, 그리고 ‘대학’이라는 신종 카스트제도의 카르텔 속에서 학벌이라는 ‘우상’을 깨기 위해서는 ‘이성’을 가지고 ‘우상’의 동굴로 뛰어들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변명이긴 하지만, 이러한 생각들이 지금의 지독한 억압적 입시체제 속에서 나를 세워주는 기둥 구실을 하고 있다.

나를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이 입시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는 나처럼 ‘현실’이라는 굴레에 얽매여서 ‘세상이 다 그렇지’ 하며 쉽게 순응한다. 사실, 현재와 같은 입시제도를 부숴버리고 싶은 심정은 아마 대한민국 고3들의 공통 정서가 아닐까 하고도 생각해본다. 그러나 멍에와도 같은 ‘현실’의 무게감은 비합리적 체제에 ‘어쩔 수 없이’ 순응하게 만든다. 어쩌면 나를 포함해서 많은 고3들은 현재의 체제를 정면으로 거부하고 당당히 굴레를 깨고 나와 ‘아프다!’고 소리쳐줄 사람을 절실히 필요로 했을지 모른다. 아니 필요했다.

지난 10월13일, 서울대 자퇴를 선언한 유윤종씨는 대학을 거부하며 현실 학벌사회의 차가운 냉소적 시선을 정면으로 맞닥뜨렸다. 그리고 그들을 향해 소리쳤다. ‘아프다!’ 고려대 김예슬씨가 ‘자본의 논리에 충실한 교육은 가치가 없다’며 자퇴한 것에 이어 유윤종씨는 ‘제2의 물결’을 일으키고 있다.

그는 세상에 질문을 던졌다. 입시 위주의 교육이, 학벌 중심 사회가, 경쟁 일변도의 줄세우기가 과연 타당한지? 그는 자퇴 선언에 이어 대학입시를 거부하는 청소년들과 함께 ‘대학입시 거부 선언’을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단지 ‘대학 가지 않겠습니다’라는 한마디를 위해 서울대를 자퇴한 그의 모습에 자꾸 전태일이 겹쳐진다. 굳이 가지 않아도 될 대학을 반드시 가야만 하는 사회, 대학을 가지 않는다면 주변의 냉소와 따가운 시선, 차별을 견뎌내야만 하는 사회. 과장해서 말하자면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대학 가지 않겠습니다’라는 한마디는 흡사 몸을 불사르는 용기가 전제되어야 한다. 유윤종씨는 자기 몸을 불살라(?) 대학을 가야만 하는 불합리한 사회에 저항했다.

그러한 유윤종씨가 말하는 ‘대학입시 거부 선언’에 대해서 주변의 냉소가 만만치 않다. 내 친구들과 이야기해보아도 ‘비현실적’이라는 대답이 주류이다. 맞다. 유윤종씨 스스로 인정했다. 이 얼마나 비현실적인가? 아직 정치적 주체로 표면에 떠오르지도 못하는 청소년들이, 대학을 거부한다고 선언을 하면 과연 세상이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줄까? 청소년들의 ‘미성숙한’ 판단으로 단정짓고 톱뉴스 목록에서 제외시키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 운동이, 선언이 효과가 있고 없고의 차원을 떠나서, 청소년들이 대학입시를 거부하겠다고 의사를 표시한 것은 제도권 교육에, 학벌사회에, 기업화된 대학에, 무한경쟁 레이스에, 불분명한 미래를 준비할 것을 강요받는 현실에 정면으로 저항하는 것이다.

그동안 입시에 대해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기는 했지만, 저 오만함의 정점에 서 있는 대학들은 광적인 입시 풍토에서 천문학적인 이익을 올리면서 입시에 대한 갖가지 비판에는 코웃음을 쳐왔다. 이제는 글과 말을 통한 비판이 아니라, 행동으로 저 강고한 기득권의 철옹성에 균열을 내겠다는 청소년들의 분노가 결집된 것이 ‘대학입시 거부 선언’인 것이다. 고려대에 이어 서울대 자퇴, 그리고 이어지는 이러한 입시 거부 운동 혹은 대학 거부 운동. 우리는 이 연쇄적 현상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살인적인 입시제도에 ‘열정적으로’ 순응해온 내 입장에서 대학입시 거부 선언을 바라보는 심정은 복잡하다. 속으로 동조하면서 지지 의사를 표시하지만 선뜻 참여하기에는 어깨에 짊어진 부담이 너무 큰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렇게 글로써 지지 의사를 밝히는 것이 전부다.


흔히 우리 교육을 ‘죽은 교육’이라 한다. 왜 죽은 교육일까? 창의성 계발이 아니라 단순 암기에 문제풀이 반복이라서? 입시만을 바라보는 경직된 교육이라서? 그것도 있겠지만 우리 교육이 ‘죽었다’고 말하는 것은 현재의 교육이, 현재의 입시제도와 경쟁만을 중시하는 풍토가, 좀더 나아가 학벌만을 중시하는 사회풍토가 학생과 학부모, 교사와 학교를 스스로 죽게 만들기 때문이 아닐까? 서열화된 대학, 수능으로 일원화된 입시제도, 과도한 입시경쟁, 그로 인한 ‘위너’와 ‘루저’의 구분, 그것을 기둥 삼아 세워진 학벌사회. 죽은 것은 교육뿐만이 아니다. 청소년들의 대학입시 거부는 ‘낙오자들의 반란’이 아니라 죽어버린 사회에서, 죽으라 강요하는 체제 속에서 살고자 몸부림치는 이들의 절절한 외침이다.

대학입시 거부 선언이 대한민국의 교육제도 및 사람들의 의식을 단번에 바꿀 순 없다. 이제 시작이다. 많은 사람들이 ‘불가능하다’며 고개를 내저을 때, 이들은 좀더 ‘사람다운’ 세상을 위해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모두가 대학을 향해 ‘예스!’라고 할 때, 이들은 외로운 용기로 ‘노!’라고 대답한다. 이들이야말로 카뮈가 말한 진정한 ‘반항인’이 아닐까? 나는 먼지보다 작은 용기만을 가진 고3이지만, 이들의 움직임에 대해서 가슴 깊이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제도 속에서 제도를 거부하는 ‘겁 없는’ 이들의 행진은 계속될 것이다. 계속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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