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1.11.21 19:42
수정 : 2011.11.21 19:42
황규관 시인·한국작가회의 자유실천위원장
아무런 ‘꼼수’ 없이 자진출두했는데
‘증거 인멸 및 도주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구속영장을 발부한 법 논리
송경동 시인과 정진우 진보신당 비정규직 실장에게 구속영장이 발부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2011년 대한민국 사회를 들었다 놨던 사건 중에 희망버스를 손가락에 꼽는 것은 전혀 과장이 아닐 것이다. 일면식도 없는 인연인데 한 여성 노동자의 외로운 싸움에 시민들이 동참한 것 자체가 참으로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 신기함은 무슨 의아함이나 희한함과는 거리가 멀다. 한진중공업 해고노동자들에 대한 연대의 마음은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비극을 겪고 나서 일어난 내면의 변화일 가능성이 크다. 용산참사를 우리 사회가 앓고 나서 두리반 싸움을 지켜냈듯이 말이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삶 자체가 무척 위태롭다는 실존적인 불안감이 그 많은 사람들을 희망버스에 타게 한 바탕은 아니었는지 골몰해 볼 일이다.
대략적으로라도 우리 사회의 자화상을 그려 보는 일은 문학이나 인문학의 기본 소임일 텐데, 감히 말하자면 이 일에 가장 헌신한 이가 바로 송경동 시인이다. 나는 그를 영웅시하고 싶지 않은 쪽에서 바라봐도 꽤나 극단적인 입장에 속한다. 심지어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의 외로운 싸움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개별적인 아픔을 가리게 되는 역설적인 일은 벌어지지 않을까 내심 우려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싸움을 폄하하려는 어떤 도발도 절대 용납할 수 없거니와 사실관계마저도 자신들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뒤트는 언론 같지도 않은 언론이나 상식과 합리성은 약으로 쓰려고 해도 찾기 힘든 수구 논객들의 데마고기는 단지 원한감정이 내뱉는 배설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아무런 ‘꼼수’ 없이 자진출두 형식을 택한 이 두 사람에게 ‘증거 인멸 및 도주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구속영장을 발부한 이 나라의 사법권력 또한 이미 그 윤리적 정당성을 잃은 지 오래다. 우리는 사법권력이 앵무새처럼 되뇌는 법의 논리가 얼마나 부실하고 기계적인지, 얼마나 뿌리 깊게 자기기만적인지 숱하게 경험한 바 있다. 이미 법은 정의와도 상관없고 최소한의 양식도 갖추지 못한, 참으로 희한한 말장난에 지나지 않게 되어 버린 것이다. 이는 현 정권 들어 더욱 노골화되었음을 모르는 사람만 모르고 아는 사람은 다 안다. 희망버스는 노동자를 대책 없이 해고한 증거를 인멸하고 해고노동자들의 절규를 모르쇠로 도주하려는 자본과 그 자본을 감싸고도는 우리 사회에서도 삶은 존엄하다는 사실을 즐겁게 증명했을 뿐이다. 대체 어디에다가 ‘증거 인멸 및 도주 우려’ 같은 해괴한 논리를 갖다 붙이는 건가.
시인이라고 해서 상식적인 법 집행에서 예외여서는 안 되겠지만, 이번 일은 법적 논리에 앞서 따져봐야 할 게 있다. 아무것도 가진 건 없고 다만 연대와 희망만은 꺼뜨리지 않으려 했던 사람들의 심정을 한번이나 생각해 봤는지 묻고 싶다. 애당초 이른바 ‘가진 자’들이 그런 훈련이 되어 있지 않아서 희망버스가 떠난 것은 아니었던가. 그러나 법은 항상 사태의 순리를 역행해 왔다. 하기야 우리 사회가 삶에 대한 예의와 함께 사는 일의 가치를 존중할 줄 아는 사회라면 검사나 판사는 한가한 자리 중 으뜸이 되었을 것이다. 법에 대한 무지를 변명 삼아 묻겠다. 법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 법은 자본과 정치권력의 부속장치인가, 아니면 부정의를 선별하는 척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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