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1.12.21 19:37
수정 : 2011.12.21 19:37
절대평가는 절대적으로 옳다. 여기에 대해서 왈가왈부하지 말자. 상대평가는 첫째로 근대적 개인주의와 상충한다. 도대체 왜 나에 대한 평가가 주변 동료들에 의해 달라져야 한단 말인가? 둘째로 교육의 다양화를 방해한다. 예를 들어 절대평가 기능을 가진 미국 대학입학자격시험(SAT)과 달리 수능은 석차를 통해 평가하기 때문에, 서울대가 필수로 지정한 국사라든가 과학고생들이 선호하는 물리 등은 기피 과목이 되어버린다. 셋째로 동료들간의 경쟁을 유도하므로 협동능력이나 팀워크 같은 사회적 역량을 신장시키는 것을 방해하고, 체감 경쟁강도가 높다. 서구 각국에서 예외 없이 절대평가를 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문제는 교과부의 절대평가가 ‘학년별 평가’를 전제로 삼는다는 점이다(여전히 ‘학년 평균’이 기재된다). ㄱ교사가 1·2·3반을 가르치고 ㄴ교사가 4·5·6반을 가르친다면, ㄱ교사는 당연히 1·2·3반을 평가하고 ㄴ교사는 4·5·6반을 평가해야 맞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1반에서 끝반까지 똑같은 시험문제를 내야 한다. 심지어 수행평가도 똑같아야 한다. 그러니 ㄱ교사와 ㄴ교사는 똑같이 가르쳐야 한다. 그런데 ‘똑같이 가르친다’는 게 가능할까? 또는 바람직할까? 교사가 로봇인가? 결국 ㄱ교사와 ㄴ교사는 ‘그냥 교과서에 있는 걸 가르치자’고 합의하고, ‘늘 봐온 전형적 시험문제를 출제하자’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전형적 문제들’은 학원에서 다 가지고 있다. ‘족보’라는 이름으로.
우리나라에서 내신성적 반영비율을 높여도 사교육 절감효과가 그다지 나타나지 않는 것은 첫째로 상대평가의 특성상 도가니에 갇힌 채로 동료들과 무한경쟁을 해야 하기 때문이고, 둘째로 교사별로 개성화된 수업과 평가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극단적으로 말해서 수업시간에 잠을 자도 학원에 가서 시험공부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똑같이 임진왜란을 배워도 ㄱ교사는 <난중일기>를 읽고 토론시키고 이를 수행평가와 시험문제에 반영하고, ㄴ교사는 <조선왕조실록>의 관련 기록을 발표시키고 이를 수행평가와 시험문제에 반영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불가능한 이유는 정부가 교육과정과 교과서의 세부 내용까지 일일이 통제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교사별 평가’가 허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교사들은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수업하고 평가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가장 중요한 ‘교권’이 부정당한 것이다. 심지어 시험문제를 ‘학업성적관리위원회’라는 곳에 제출하여 심의받아야 한다. 이번 기회에 ‘상대평가+학년별 평가’ 체제에서 ‘절대평가+교사별 평가’ 체제로 전환하고, 학업성적관리위원회의 기능을 ‘사전 인가’에서 ‘사후 보고’로 바꿔야 한다. 이것이 교과부가 주장하는 ‘창의·인성교육’을 위한 가장 손쉬운 방법이자, 진정한 교권 회복 정책이다.
끝으로 절대평가로의 전환으로 인해 특목고·자사고가 유리해질 텐데, 아예 근본적인 정책대안을 마련해 보자. 인문계 고등학교를 ‘무학년 학점제’로 전환하여 학생 개인별 과목선택권을 전면화하고, 심지어 학교에 개설되지 않은 교과는 온라인으로 이수할 수 있도록 하자. 이렇게 되면 학교별로 이뤄지는 획일적 ‘집중이수’가 아닌, 학생들의 필요에 의한 개인적 집중이수가 가능해진다. 아울러 대학입시를 미국이나 유럽처럼 ‘공통필수과목’(국·영·수)을 아예 없애거나 최소화시키고 전공별로 선택과목의 폭과 범위를 지정해주는 방향으로 재편해야 한다. 이런 방식으로 ‘다양한 교육’이라는 가치를 일부 학교의 전유물이 아닌 보편적 교육목표로 전환하면 외고나 자사고는 별도로 있을 필요가 없어지고, 과학고·영재학교는 연구역량이 뛰어난 학생들을 위한 위탁교육기관으로 전환하면 된다. 이러한 변화에 3년 정도의 예고 및 준비기간이 필요할 것이다.
이범 서울시교육청 정책보좌관·교육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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