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1.12.28 19:51 수정 : 2011.12.28 19:51

일러스트레인션 유아영

한번은 너무 힘들어 기숙사에서 자살을 시도했던 적도 있습니다

지금의 ‘일진’은 어른들 세대의 ‘날라리’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애들이 시험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더 잔인해지는데…

요즘 대구에서 일어난 중학생 자살사건으로 사회가 떠들썩합니다. 처음 이 사건을 접했을 때 제 경험이 떠올랐습니다. 저는 초등학교 때 왕따를 당해 학교를 자퇴하고 홈스쿨링을 하다가 중학생이 되어서 대안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그러나 대안학교에도 학생들 간의 폭력 문화는 존재했습니다. 학생들이 이미 초등학교에서 폭력적인 ‘일진 문화’에 익숙해져 들어오기 때문에 대안학교에 들어와서도 그 행동을 변화시키지 못했습니다. 선배들은 욕을 입에 달고 살았고, 후배들이 자신의 의견에 반대의견을 내면 그것을 빌미로 방에 가둬두고 구타하거나 협박했습니다.

저는 다른 친구들보다 더 찍혀서 선배들의 욕설과 협박, 폭력 속에서 집중적으로 몇달을 시달렸어요. 그러다 보니 친한 친구들조차 등을 돌리고 어느새 저는 왕따가 되어 있었습니다.

모두가 나를 비웃는 것 같아 사람을 만나기도 싫었고 세상에 나 혼자 남겨진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괴롭힘을 당한 뒤로 매일 누구에게 목을 졸리는 꿈을 꾸었고 때로는 복면을 쓴 누군가가 날카로운 흉기로 내 몸을 토막 내는 꿈을 꾸기도 했습니다. 하루하루 매일 똑같은 꿈과 괴롭힘이 반복되자 정말 미칠 것만 같았습니다. 선배들이 방에 찾아올까봐 새벽 4시까지 뜬눈으로 밤을 지새워야 했고 방에 와 있을지 모르는 선배들을 피해 항상 여기저기 방황했습니다. 나를 괴롭히는 선배들이 내 이름을 부르면 화들짝 놀라 울기도 했습니다. 한번은 너무 힘들어 기숙사 꼭대기에 올라가 자살을 시도하려고 생각했던 적도 있습니다. 아마도 적지 않은 전국의 초·중등 학생들이 저와 같은 마음을 먹은 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언론을 보면, 어른들은 우리들의 어려운 처지와 상처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언론 기사는 문제의 진단과 대책보다는 선정적인 기사로 넘쳐나고 그 기사에 달려 있는 인터넷 댓글들을 보면 가해자를 사형시켜야 한다는 공격적인 댓글이 압도적입니다. 그리고 ‘부모님께 왜 말을 하지 않았나?’, ‘주변 사람에게 말하면 되지 왜 자살까지 하나’라는 댓글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화가 나는 것은 이 두 가지 댓글 다 결국 우리 아이들에게 책임을 묻는 목소리라는 것입니다. 차이가 있다면 그런 녀석들은 사형시켜야 한다는 댓글은 가해 학생들에게, 왜 말을 하지 않았느냐는 댓글은 피해 학생들에게 책임을 묻는다는 것이죠. 왜 힘없는 학생들만 이런 무거운 짐을 짊어져야 하나요? 우리들을 안전한 환경 속에 살게 하고 올바른 규범을 만드는 데 도움을 주어야 할 어른들, 힘없는 교사와 부모가 아니라 힘있는 어른들, 정치인들, 교육감, 대통령 같은 분들에게는 왜 그 책임을 구체적으로 묻지 못하는 걸까요.

우리가 어른들에게 이야기하지 못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먼저 두려움 때문입니다. 가해자가 그 얘기를 들었을 때 보복을 할 것이라는 두려움도 있지만, 이러한 순진한 생각만으로는 우리들의 생활을 잘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학교에서 일어나는 대다수 심각한 폭력은 ‘일진’ 아이들에 의해서 일어납니다. 어른들에게야 일진 아이들이 조금 더 힘이 세거나 인맥이 더 넓은 정도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아이들에게 일진 아이들은 학년과 학교, 지역사회에서 거대한 조직을 이루면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존재로 다가옵니다. 선생님과 상담을 하려고 해도 일진 아이들이 상담실 앞에서 누가 오나 항상 감시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리고 교무실이나 상담실에 찾아가는 학생이 있으면 학교 전체 차원에서 그 아이를 왕따로 만들어버립니다. 대전 여학생 자살사건, 그리고 대구에서 지난 7월에 일어났던 자살사건은 그래서 생긴 것입니다. 우리 학생들의 눈에는 이렇게 확실하게 보이는데, 왜 어른들의 눈에는 안 보이는 것인지 답답하기 짝이 없습니다.

다음으로 어른들에게 이야기를 하더라도 어른들이 우리 시대와 경험이 다르기 때문에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설명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요즘 학교폭력을 주도하는 것이 일진 아이들인데 다른 말로 ‘노는 아이들’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부모님과 이야기를 하면서 노는 아이들에 대한 개념이 우리 시대와 부모님 시대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옛날에는 노는 아이들이 주류가 아니었습니다. 노는 아이들이라고 해도 학교 바깥에서만 일탈행동을 하고, 교실에서는 교사에게 찍힐까봐 조용히 있었고, 돈을 뺏거나 다른 아이들을 괴롭힐 때 평범한 친구들이 협력하지 않았죠. 그러나 요즘 일진들은 다릅니다. 일진 아이들이 만들어가는 일진 문화는 청소년 문화의 주류입니다. 일진 아이들이 성·운동화·옷에 대한 모든 유행을 주도합니다. 대표적으로 요즘 유행하는 노스페이스 패딩도 일진들이 입어서 유행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 일진들은 돈을 걷을 때에도 몰래 갈취하는 것보다는 합법적인 명분을 동원해서 빼앗습니다. 연애 기념일(투투데이, 백일기념일 등), 생일, 빼빼로데이, 밸런타인데이 선물 등의 이유로 돈을 갈취하고 때로는 티켓 강매 등으로 돈을 모금하기도 합니다. 왕따 현상 역시 일진 아이들의 지위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이해하기 힘듭니다. 옛날에는 노는 아이들이 한 아이를 왕따시키려 해도 다른 아이들이 동조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요즘에는 일진 아이들이 주류로서 학급 아이들의 생활 문화와 질서를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일진 아이들이 한 아이를 왕따시키면 다른 아이들도 살아남기 위해, 즉 자신이 왕따 당하지 않기 위해 동조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괴롭힘 당한 것을 선생님이나 부모님께 알릴 경우 고자질했다고 ‘찌질이’로 놀림을 받기 때문입니다. 일진 아이들이 의도적으로 그런 방향으로 몰아가고 다른 아이들도 거기에 동조하거든요. 또 학생들은 또래집단에서 일어난 일을 어른들에게 말하면 배신자로 낙인찍어요. 그래서 그런 아이들이 ‘전따’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왕따를 당하는 아이들은 ‘누구도 자신의 말을 믿어주지 않을 것이다’, ‘이야기해도 잘 들어주지 않을 것이다’, ‘이 세상에 나 혼자밖에 없다’고 느낍니다. 이런 관계적 곤경에 빠진 아이들은 학생이든 어른이든 누군가가 진심으로 말을 들어주려고 할 때만 마음을 엽니다.

평상시에는 아무런 관심을 가지지 않다가 이런 사건이 터졌을 때에만 흥분해서 신상 정보를 파헤치고 공격적인 말들을 쏟아내는 것은 또다른 폭력입니다. 그것이 바로 자살 충동을 일으키게 하는 사회적 공격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누리꾼분들, 이제 흥분을 가라앉히십시오. 지금 해야 하는 것은 가해자에 대한 무조건적인 분노를 표출하는 일이 아닙니다. 다시 똑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지금부터라도 관계적 곤경에 빠져 힘들어하는 아이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어른들, 지금의 일진은 어른들 세대의 ‘날라리’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더 이상 어른들의 경험을 우리에게 내세우지 마세요. 어른들의 그런 태도가 아이들의 목소리에 힘을 잃게 합니다. 이제 우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관심을 가져주세요. 관심과 보살핌, 이것만이 상처받은 아이들의 마음을 열 수 있는 단 하나의 열쇠이고 치료제입니다.

그리고 이명박 대통령님, 범정부적인 차원의 학교폭력 대책을 만들어내겠다고 했는데 솔직히 이명박 대통령님은 일진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상담교사요? 일진들은 상담실 앞에서 누가 오는지 항상 감시하거든요? 아예 상담실에 가지를 못하는데 상담선생님을 배치한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지나요? 그리고 애들이 시험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더 잔인해지는데 그런 것은 대통령이 책임져야 할 것 아닙니까? 이명박 대통령님이 진짜 학교폭력에 대처하고 싶다면 가장 먼저 일진이 무엇인지, 아이들의 목소리를 가감 없이 들어볼 수 있는 기회를 만드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문한뫼 16살·충북 청원군 현도면


광고

브랜드 링크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