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왜냐면] 가슴 시린 고백 / 박용준 |
우리 반 친구들에게.
안녕, 여러분! 우리들이 만난 2011년도 거의 다 저물어 가고 있어요. 작은 교실 안에서 참 많은 일들이 있었는데, 여러분 마음속에는 그중 어떤 것들이 자리잡고 있을까요? 선생님은 방학이 시작된 며칠 전부터 계속 그 궁금함에 사로잡혀 우리들의 한해살이를 되돌아 보았어요. 웃음을 짓게 하는 추억들이 정말 많더군요. 그런데 선생님의 마음을 계속해서 무겁게 짓누르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오늘 이것을 여러분에게 고백하려 합니다.
‘실내에서 흰색 고무 실내화만 신도록 강요해선 안 된다’부터 ‘겨울방학 숙제의 양은 적절하지 않다’까지 지난 1년간 우리는 다양한 논제를 갖고 엄청난 토론을 해왔습니다. 그중 대부분은 여러분들의 바람대로 결정되었고, 시행하면서 생긴 문제점들은 회의를 통해 더 나은 방향으로 조금씩 고쳐왔지요. 하지만 민주적이라며 여러분이 좋아하고 자랑스러워했던 그 토론, 그 소중한 것을 선생님이 망가뜨렸습니다. 보잘것없는 지위를 이용하여 선생님 마음대로 결론을 내거나, 사실을 말해주지 않으면서 서둘러 토론을 마무리했습니다. “기말고사에 이어 시험을 연속으로 보는 것은 우리를 시험보는 기계로 만드는 것이에요”, “유엔 아동·청소년 권리협약 위반이에요” 등 국가수준 학업성취도 평가를 앞두고 여러분이 다양한 의견을 제시했지만 “안 할 수 없다”며 묵살했고, 분단체험 당시 ‘건너편에 있는 친구들과 꼭 필요한 대화는 할 수 있게 하자’는 남북 정상회담 결과를 두고 선생님이 ‘절대 불가’ 입장을 내세우며 무효라 하는 바람에 토론까지 벌어졌지만 ‘절대 불가’의 근거가 뭐냐며 궁금해하는 여러분에게 끝내 그 이유를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얼마 전, ‘인터넷 게시판이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표현의 자유가 어디까지 가능한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지요? 여러분은 사회시간에 나누어줬던 ‘대한민국 헌법’을 근거로 제시하였고, 선생님은 같은 법 37조2항으로 반박했습니다. 그러자 이아무개 친구는 ‘한국은 가상공간에서 표현의 자유를 제한받고 있다’는 미국 신문기사를 인용하며 “선생님은 우리들이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이 우리들에게 큰 피해를 주거나 우리나라를 망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라는 질문을 던졌고, 선생님은 37조2항 이야기를 한 번 더 한 뒤에 토론을 마무리했죠.
찬 바람의 기운이 남아 있던 꽃내음달부터 찬 바람이 다시 불어드는 마무리달까지 ‘당신이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머지않아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는 말을 침 튀겨가며 수차례 소개했지만, 그것은 선생님의 잘난 척이었고 위선이었나 봅니다. 사실과 용기 앞에서 머뭇거린 선생님의 고의적 외면은 여러분에게 ‘생각하는 대로 사는 길’을 열어주어야 하는 책임을 적당히 넘기려는 꼼수였습니다. 여러분 앞에 처음 섰을 때 ‘존칭을 사용하겠습니다. 서로에게 낮은 자세로 다가갈 때 관계는 진실하며, 동등한 높이에 있어야 토론과 소통이 가능하고 그렇게 되면 모든 것이 더 좋아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약속했지만, 선생님은 여러분보다 높은 곳에 있었습니다. 즉, 그것은 토론도 소통도 아니었습니다.
곧 있으면 졸업입니다. 어느 곳에 가더라도 선생님의 이 가슴 시릴 수밖에 없는 고백을 기억해주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진실한 관계 안에서 소통하고, 용기를 통해 더 착한 것을 만들어 가는 사람으로 자라나길 바랍니다. 선생님 또한 이 편지가 고백의 시작이 아닌 끝이 되도록 쉼 없이 노력할 것을 약속할게요. 행복과 건강이 여러분 곁에 늘 함께 하길 빕니다.
2011년 끝에서 선생님으로부터.
박용준 경기도 포천 내촌초 교사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