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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2.01.02 19:39 수정 : 2012.01.02 19:39

10여년 전에, 우연히 서울 세종문화회관 근처에서 시위에 참석한 적이 있다. 그 시위는 대전에서 한 중학생이 자살한 것에 대한 어머니들의 한 맺힌 집회였다. 이 학생은 아이들에게 많은 폭력을 당하고 자살하기에 이르렀지만, 사후에 학교나 교육청은 이에 대한 책임을 거부했다. 그 이후에도 그 부모는 교육청의 도의적 책임을 지속적으로 물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부 어디에서도, 언론 어디에서도 여기에 대한 신원이나 보도를 한 번도 해준 적이 없었고, 결국 사건은 묻혔다.

그리고 세월이 지난 지금, 또다시 동일한 자살이 일어났다. 이번에는 조·중·동을 비롯한 전체 언론이 학교폭력의 문제성을 거론하면서 학생들을 어떻게 잘 교육해야 할 것인지를 고찰하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들린다. 무관심으로 일관했던 10년 전과 달리 교육청도 문제 해결의 의지를 보이기 시작했다.

역설적으로, 지난 10년간의 이러한 ‘발전’은 그동안 사회 안에서 발생하는 폭력에 대해 무감각했던 우리 사회의 모순이 해소되는 과정과 함께 터져나왔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그동안 ‘당연하게 여겨졌던 것’들이 ‘폭력’으로 인식되고, 그것을 해소하기 위한 사회적 합의가 이제서야 시작되었다는 것에 만시지탄을 금할 수가 없다.

10년 전의 자살로 당시 교육부와 교육청이 정신을 차리고 학교폭력에 대한 완벽한 대안을 제시했으면 과연 그 학생은 죽을 필요가 있었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교육부는 분명히 보복의 가능성이 있는 ‘소원수리’나, 시수도 얼마 되지 않고 실효도 전무한 폭력예방 교육만으로 이를 해결하고자 했다. 결국 교육부의 무관심이 소중한 생명의 자살을 불러온 셈이다.

한가지 더 큰 문제는, 학생들이 이러한 폭력을 사실은 교육당국에서 배운다는 점에 있다. 중학교부터 시작되는 두발 규제나 소지품 규제, 교사의 지도를 가장한 ‘합법적인’ 폭력은 한창 자라는 학생들에게 반발심을 불러일으키고, 결국 이는 학교로부터 기인한 폭력이 아이들을 통해 학교폭력으로 재생산되는 결과를 낳는다. 또한 학교 교육이 원하는 인재상이 사실은 ‘모든 것에 능달한 일반 시민’이라는 것과, 한국와 일본에서 ‘이지메’가 극렬하게 심한 이유가 학교에서 주입하는 동일성 유지(즉, 순응 잘하는 우등생)라는 이데올로기의 내면화 강요라는 점에서, 이 문제는 사실 개인이 가지고 있는 다양성을 존중하기보다 말살하고 대학 진학만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하는 한국 중등교육구조 자체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좋은 대학에 가야 사회에서 잘살 수 있다’는 이데올로기가 가져다주는 근본적 폐혜는 생각보다 심하다. 코스프레나 애니메이션을 좋아한다고 말했다가 학교 안에서 ‘못생긴 오타쿠’로 찍힐까봐 친구들의 시선을 살피고, ‘마마몬’에게 걸리면 자신의 용돈을 털어 산 용품을 다 빼앗기게 되니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할 수밖에 없는 학생들과, 교회 가는 것보다 공부가 중요하니 무조건 학교에 나오라는 교사의 협박에 자기 의사에 반해 어쩔 수 없이 학교 자율학습에 나오는 고3이 속출하지만, 정작 이러한 비가시적 폭력을 휘두르는 쪽에서는 ‘학생 교육을 1년 해보고 그런 소리가 나오는지 말해보라’며 책임을 회피하는 모습이 난무한다. 이러한 ‘우리들의 일그러진 학교’의 모습이 바뀌지 않는 한, 이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책은 절대로 도출되지 않을 것이다.

학교폭력의 피해자였던 사람으로서, 아직도 몇몇의 ‘대책’으로만 이번 사태의 대책을 논의할 교육부와 학생에게 가하는 폭력과 인권침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학교 일선의 교장·교감들에게 학생 교육체계 자체에 대한 회개와 반성, 두발 규제와 휴대전화를 비롯한 수업시간 이외의 소지품 규제 전면 중단, 그리고 창의성·다양성을 인정하는 교육제도의 설립을 요구한다.

윤은호 인하대 문화경영학과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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